[영화] 버닝 (2018) BURNING

기사입력 2018.07.2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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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2018)
BURNING

버닝-포스터.jpg
장르 : 미스터리
제작 : 한국
 
시간 : 148분
개봉 : 2018.05.17.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 이창동
주연 : 유아인(종수), 스티븐 연(벤), 전종서(해미)



양귀자는 오래 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외쳤다. 제목이 말하듯, 우리는 금지된 것, 억압된 것, 다르게 표현하면 내게 없는 것을 소망한다. 소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금 없음’을 내포한다. 우리는 언제나 없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 앞으로 내게 있어야 할 것을 소망한다. 그래서일까?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지상에 없는 곳’이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실과를 먹었다. 금지된 것일수록 성경의 표현대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난 뒤 아담과 하와는 실낙원한다. 자신이 소망하던 것으로부터 단절이다. 추방이다. 이어서 아담과 하와는 소망하던 것을 찾기 위해 분노한다. 가인은 분노의 화신이다. 동생 아벨의 제사만이 받아들여지자 그는 분노했다. 분노는 인정욕구이자 부재에 대한 표출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아벨에게 분노했고 아벨을 죽인다.

종수는 소망하는 존재다. 그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소망한다. 꿈 꾼다. 작가가 되기 위해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의 조금은 너스레 같은 말처럼 그는 더 멋있어 보이고, 더 나은 삶을 소망하고 바란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다.

해미 또한 소망하는 존재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레이터 모델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소망한다. 그녀의 표현대로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를 꿈꾼다. 정작 자신의 실제 삶은 단순한 ‘리틀 헝거’지만, 적어도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다. 그녀의 판토마임은 그녀의 삶에 대한 메타포다. “여기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부재를 잊어버리라는 것, 그것은 또한 소망의 다른 측면이다.

버닝4.jpg▲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종수는 이내 해미에게 빠져든다. 해미는 종수에게 소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종수가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하게 된 것,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을 준 존재다. 종수는 자신에게 몸을 내어준 해미가 이제 자신의 소유, 혹은 소망이라고 여긴다. 그러하기에 아프리카로 갑자기 떠난 해미지만 크게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돌아올 것이니까. 종수는 해미가 없는 방, 눈에 보이지 않는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에게 밥을 주면서 그녀의 부재를 극복해간다. 그녀의 방에 있다는 것, 그녀의 고양이를 돌보고 있는 것이 종수의 희망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아프리카에서 해미는 벤과 함께 나타난다.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하지만 벤의 등장은 종수의 불안을 증대시키기에 충분하다. 그의 고급스런 스포츠 카, 집, 몸에 벤 상류층의 태도, 알 수 없는 미소, 벤은 종수에게 상대적 결핍을 안긴다. 결핍이 없다고 생각한 종수는 벤에 의해 결핍을 가지며 무엇보다 자신의 사람이라고 믿었던 해미의 흔들림 앞에서 불안해하고, 벤에 대한 종수의 집착은 이내 분노로 바뀐다. 종수에게 벤은 소망하던 것의 상실, 소망 자체의 상실을 안겨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예전 가인처럼 결핍은 분노로 치닫는다.

벤 역시 다른 삶을 소망하는 존재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남자, 결핍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벤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자주 하품 하듯, 벤은 자신의 삶이 지겹다. 반복되는 일상, 의미 없는 삶, 형식적인 가족, 친구들 – 벤은 이러한 것이 아닌 진짜 삶을 소망한다. 해미라는 존재는 벤에게 그런 다른 삶을 이야기해 주는 대상이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벤은 실망해 버리고, 자신의 표현처럼 태워버리고 만다.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통해 현대인들의 알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대부분 분노로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노의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막연하게 이유 없이 그냥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종수에게서, 해미에게서 그리고 벤에게서 그들의 분노는 실상 결핍에서 오는 분노로 느껴진다. 특히 종수는 더욱 그러하다. 아니 해미의 말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없었던 것을 있다고 착각하기에 느끼는 분노가 아닐까?

종수는 글을 쓴다. 어쩌면 해미도 벤도 종수의 또 다른 이면이 아닐까? 원래 없던 것을 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분노가 치밀고 증오와 집착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비닐하우스라는 모호함,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판토마임의 모호함,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 경계, 착각이 종수의 내면 아닐까? 벤은 종수의 상상 속에 실재하는 아니 자신이 소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은 종수 자신이며, 해미를 상상 속에서 사랑한 것은 아닐까? 벤의 차에 기름을 붓고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며 태워버리는 종수는 실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망하던 것을 태워버린 것 아닐까? 잡힐 듯 잡히지 않은, 한 발 다가가면 멀어져 버린, 언제나 소망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신기루 같은 삶을 태운 것 아닐까? 없는 걸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종수의 자위는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

우린 모두 실낙원의 존재들이다. 본질적 부존의 현실을 살아간다.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소망하는 존재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신 그 분의 품 안에 안기기까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 욕망과 허상을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체스터톤의 해석과 같이, 하나님 대신 창녀를 찾아 사랑을 갈구하며 가슴 태우는 존재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우리 것으로 착각하는 것, 원래 없던 것을 있던 것으로 착각하는 것, 진짜가 아닌 가짜를 확신하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는 것, 이 욕망과 허상을 태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양현 목사.jpg
본 글을 기고한 김양현 목사는
서울 영천교회 청년 담당목사로 영화와 신앙의 통섭을 꿈꾸는
기독영화평론가이다.
부산 CBS 시네마 톡톡을 오랜동안 진행했으며 현재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기독교적 관점의 영화평을 기고하고 있다.
본 글은 월간고신에 기고한 글을 재연재 하는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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