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해-3) 언젠가 다가올 죽음

죽음을 생각함은 인생을 정성스럽게 한다
기사입력 2016.01.1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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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호목사사진.jpg
지난 시간에 이어 약간 반복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반복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은 기억을 강화시켜 줍니다. 반복은 체화에 도움이 됩니다. 반복은 가르치는 일에 확신을 줍니다. 잘못된 반복은 세뇌이지만 올바른 반복은 진리의 시식을 가르치는데 큰 유익을 줍니다.
 
죽음은 대부분 사람에겐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가급적이면 죽음을 멀리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상태, 곧 없음의 상태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죽음은 미지의 세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한 여행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막연하고 두려운 대상입니다.
 
죽음은 그것을 노래하거나 희희락락 할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교회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는 정서를 가지고 있나요?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요? 제가 보기에 교회가 죽음의 문제를 그렇게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빈번하게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성도의 죽음, 인간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다루는 경향은 빈약해 보입니다. 주후1세기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고전 15:31-32 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표현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죽음이해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죽음, 즉 일상 속에 깊이 적용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 추구하는 세속의 죄성을 없이하는 작업, 즉 날마다 죽는 작업을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어떤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이성과 감정이 죽기를 소망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을 언급하는 장에서 자신의 죽음은 부활을 소망하는 영생에 대한 열망임을 강조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르는 그 과정을 사모하였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중환자나 말기환자가 자신이 그렇게 중환자가 되기 전에나 말기환자의 상태에 처하기 전 죽음에 대한 어떤 공부나 사전 이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죽을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죽음을 공부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때 황당한 죽음의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안스러운 것입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응시할수 있는 곳은 장례식장입니다. “혼인식이 열리는 예식장 보다는 죽음의 처리과정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기를 좋아하라” 는 주의 말씀이 있읍니다. (전7:1-2)거기에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여러분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열심히 주를 섬기다가 일생의 수고를 다 마치고 하나님께서 “수고했다. 너 이리 오너라!” 부르실 때 그 때에 “네” 하고 가는 죽음이라면 그 날은 출생보다 훨씬 나은 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놀라운 교리를 우리에게 전해 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곁에서 슬프게 울고 있는 어거스틴을 보고 이렇게 말씀 했다고 합니다. “얘야, 너무 슬퍼마라,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에서 다시 보자!” 그리고 무덤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 “아무데나 묻어다오! 하나님 앞에서 부활할 것 아니냐? ” 이렇게 유언을 하고 죽었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아름답고도 멋진 교훈을 듣고 또 배울지라도 장례식장에 가게 되면 얼른 조문하고 속히 벗어나려는 마음을 갖기 일수입니다. 호상이 아닌 비참한 죽음이나 병사, 또는 사고사의 경우는 그 분위기가 침울하고 우울하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거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호상이 아닌 급상을 당한 가족들의 슬픔을 함께 아파하면서 머무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워 함께 애도하고 슬퍼해 주는 문화는 죽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진정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정서적인 여유가 사라져 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실상 보통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주검이나 시신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것인지, 죽음이 얼마나 존엄하고 고귀한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꼭 시신을 보아야만 죽음을 마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시신을 응시해야만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20세기 말부터 사람들은 죽음을 공부하고 배워야 할 학문으로 일반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죽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tv를 통해 보고 듣습니다. 전쟁이나 테러로 인한 죽음, 메르스로 인한 죽음, 천재지변으로 인한 죽음, 최근에는 과격 이슬람(IS)의 정치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테러와 살해, 처형당하는 모습이 동영상에 나도는 바람에 큰 충격을 줍니다.
 
심지어 각종 어린이 질병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집안에서 키우는 구피물고기나 애완동물들의 죽음도 보게 봅니다. 근, 현대에 들어와서도 양차대전과 각 대륙에서 끊어지지 않았던 전쟁들과 그 현장을 생중계하였던 방송에서도 죽음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보아왔습니다.
 
다양한 죽음을 보며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배웁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물이든 호흡하는 것은 모두 죽습니다. 심지어 세포나 세균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나 발톱 손톱을 깍을 때 조차도 우리는 우리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죽는 모습을 봅니다. 모든 죽음에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좋은 죽음, 올바른 죽음, 죽음이 주는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거나 생각하기 싫어 머리를 흔들어도 우리는 반드시 때가 되면 죽게 됩니다.자신의 죽음을 응시하면서 평생을 같이 해온 육신과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남은 생애를 정성스럽게 진정성을 가지고 경건하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전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다가 갑자기 죽음의 통보를 받게 되면 그 충격이 너무커서 남은 생애, 주어진 시간들조차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지레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아름다운 생애를 귀하게 마무리하는 법은 꼭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불행하고 악한 죽음이나 고통스럽고 추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전혀 죽음을 생각하지 않던 이에게 이런 충격의 소식이 전해지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하여 당황하게 되면 그처럼 안스러운 일 또한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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