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로마스 11장 - 김진흥박사

기사입력 2019.09.3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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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흥교수.jpg▲ 필자인 김진흥박사는 네들란드 개혁교회 캄펜신학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Sydney Collage 교수로 재직중이다.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의에 관하여 우리가 배우면 배울수록, 이 복음은 우선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의 핵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궁극적인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신 방식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런 맥락에서 복음은 우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관한 것이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경고가 있습니까?” (Gordon Cheng)       
 
이스라엘의 남은 자(11:1-10)
사도 바울은 이 장의 첫 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대인들을 버리셨는가?’ 하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고,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판단을 뒷받침하는 증거들로 우선 바울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반드시 구원을 얻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에 더하여 유대인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된다. 갈멜산에서 모두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에 단신으로 맞섰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불구하고 전혀 회개치 않는 이세벨의 위협에 직면하여 호렙산으로 피신해야 했던 선지자 엘리야의 일화가 여기서 중요한 사례로 지적된다. 혈혈단신으로 홀로 남았다고 낙망한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4절)고 대답하셨던 사실은 사도 바울에게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정작 약속된 그 메시야가 도래하였으나,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그분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바울 당대의 암담한 현실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지금도 있다’고 바울은 대답한다(5절). 거듭 반복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린 유대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 중에서 택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부르신다고 주장하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오직 은혜’(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한 번 확증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절). 다만 바울 당대의 영적 형편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마치 다윗의 예언이 응한 것처럼, ‘혼미한 심령, 보지못할 눈, 그리고 듣지 못할 귀’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떨어져 버렸다(9-10절). 9장에서 완악한 바로의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완고함에 대하여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아래에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서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 자신의 판단과 결정과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도, 유대인들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본래는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들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불신앙의 완고한 마음에 가두어두시는 것에 대하여 항변할 자격이 없다. 오히려 놀라운 일은 그런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신 뜻에 따라, 그리고 아무런 차별이 없이, 생명을 얻는 믿음으로 이끌어주신  구원의 사실이다!
 
접붙여진 가지들(11:11-24)
‘유대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는가?’(11절)라는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 다음,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한 부정으로 응답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바울의 사고는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탐구한다. 당대 대다수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통하여 구약성경이 예언한 ‘이방인의 구원’이 촉진되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이 그 언약의 성취에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현실이, 거꾸로 본래 언약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에게 자극이 되어서 그들 가운데 택함 받은 모든 자들이 믿음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라고 바울은 기대한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절).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던 바울의 자세도 바로 이런 깨달음과 직접 연결되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3b-14절).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이런 묵상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충고로 이어진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 구성상 소수파를 이루고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자랑하지 말라고 훈계한다(18절). 율법과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그들이 유대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 덕택이며, 반대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소중한 언약적 지위를 상실한 것은 불신앙 때문이었다(20절).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이신칭의’의 교리가 ‘오직 은혜’의 교리와 동전의 앞뒤를 이룰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결코 구원을 얻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자랑이나 높은 마음(자만, 교만)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는 태도가 마땅한 반응이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절). 이신칭의 교리를 남용하는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리는,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바울은 결코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준엄하신 분이다’(22절).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유대인들의 잘못된 행실을 답습하게 되면,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절). 이처럼, 사도 바울이 힘써 가르치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을 나태하게 만들거나 교만하게 만들지 않는다. ‘중생의 체험이 장래의 구원을 보장한다’는 식의 설교는 바로 이런 점에서 성경의 질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순종이 없는 자들이 거룩한 언약에서 배제된 엄중한 역사적 사실(30절)을 들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을 보라’고 교훈한다.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11:25-32)
혈육이자 동포인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이라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탐구한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아야 할 ‘신비’로 제시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5-26a절). 바울의 이런 확신의 근거는 구약성경의 예언인데,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래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구속자를 통하여 야곱의 불경건을 제거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사 새 언약을 맺으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26-27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다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바울 당대에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한 까닭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원수같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약속된 언약이 다 폐기된 것은 결코 아니다(28절).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절)라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고 있다. 비록 거듭하여 언약을 깨뜨린 불신실한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실로 삼아 주권적으로 택하신 유대인들을 그냥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함축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값없는 은혜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누리고 있는 우리는 마땅히 그 긍휼하심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32절의 말씀에서 로마서 전체의 핵심 논증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11장의 논증을 죽 읽어가다가 이 구절을 만나면, 얼핏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불순종하였던 이방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었고, 그들이 받는 긍휼에 자극을 받은 이스라엘이 다시 순종하는 자리로 돌아온다고 말하는 맥락에서, 바울은 이런 불순종이라는 테마를 갑작스럽게 일반화하는 것 같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불순종을 마치 감옥으로, 즉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죄인들이 갇혀 있는 토굴에 비유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이 한 구절에서 로마서 전체의 핵심적 논증이 무엇인지 다시 기억하게 된다. 우리가 죄와 비참(Sin and Misery)라는 표제어로 요약하였던 이 서신의 첫 세 장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윤리적인 자들과 밥먹듯 악행하는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는’(3:23) 영적 무능력을 논증하였다. 그런 다음, 사도 바울은 죄와 비참의 감옥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재 목적을 다시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의’ 밖에 없다는 구원의 복음을 3:21부터 8장 끝까지 선포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불순종은 영혼의 감옥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해주는 것이다.
 
로마서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유대인)에 대하여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주장을 신중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한 가지는 기독교회가 구약의 유대인을 대체하여 참 이스라엘의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에 주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의 수취인이 되었다는 신약의 주장을 고려할 때, 이런 해석은 진리의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 해석이 아브라함과 그의 혈통적 후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특히 11장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라엘의 육체적 후손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다른 한 가지 극단적인 주장은, 앞서 소개했듯이, 로마서의 핵심이 바로 9-11장이며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본론이 아니라 막간극(interlude)이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열방과 현저하게 구별되는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본래 백성이라는 시각을 드러내는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9-11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가르친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복음을 여전히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그 민족적 차원에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 역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통해서만’ 일어날 것이다.
 
송영(11:33-36)
로마서를 읽을 때 우리의 관심사는 종종 ‘우리 자신의 구원’에 쏠리곤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중요한 구원의 사실을 선포하면서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핵심적인 목표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뚜렷이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의  마지막 구절들에서 ‘송영’(doxology)으로 표현하고 있다(33-36절). 이 구절들은 9장의 초두에서 언급하였던 바, 바울 자신에게 ‘큰 근심, 마음에 크치지 않은 근심’이었던 동포 유대인들의 불신앙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한 결과로 나온 감사와 찬송이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우리는 종종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처럼 믿음(faith)과 송영(doxology)이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존 스토트 목사가 언급하였듯이, ‘모든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반응이며,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고찰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송영이 없는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의 지식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데, 이것은 무한하신 분을 유한한 존재의 척도로 평가해보려는 가망없는 시도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바울이 11장의 마지막 구절들에서 잘 보여주듯이,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로 인도한다.
이번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고든 쳉의 이야기는 일찍이 종교개혁 시절 칼빈 선생이 로마 카톨릭 신학자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지적한 내용을 그대로 반향한 것이다. 제네바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의 영혼 구원’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거듭 강조하였던 이 추기경에 대하여, 칼빈 선생은 자신의 구원 문제에만 골몰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는 그런 신학은 잘못된 신학이라고 타매하였다! 칼빈의 이런 지적은 바로 로마서 8장과 11장 마지막 구절들에 나타난 사도의 경건을 올바르게 꿰뚤어본 것이다. 감사하게도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성경적 사도적 신앙을 올바르게 전수받은 장로교회는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은 이런 성경의 교훈을 우리와 자녀들에게 잘 새겨준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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