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로마스 10장 - 김진흥박사

기사입력 2019.08.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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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흥교수.jpg▲ 필자인 김진흥박사는 네들란드 개혁교회 캄펜신학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Sydney Collage 교수로 재직중이다.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입장은 이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행하면, 당신은 살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쪽, 즉 참된 구원의 길은 하늘에 오르거나 아니면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한 요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같은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복음)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는 구주시라’ 혹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라는 고백으로 확보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믿음과 고백에 의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과 또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입니다(10:5-10).(앤드류 큐벤호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나, 할례라는 언약의 인침을 받고, 모세의 율법을 배워 지키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자부하였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였던 하나님의 메시야가 도래하였을 때,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였다. 그런 사태는 사도 바울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 9:1)으로 다가왔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섭리 중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로마서 9-11장에서 깊이 묵상하였다.

  우선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은 결코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또한 모세와 바로의 역사적 사실에 호소하면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이 바로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이다. 또한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은 반면,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로마서 전체에서 일관되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10장에 와서는 논의의 초점이 올바른 믿음을 가졌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에 주어진다.

 

‘율법의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은’(10:2) 책임을 동료 유대인들에게 묻고 있으며, 그들이 메시야 왕국에서 배제된 까닭을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다 오히려 힘써 하나님의 의에 불순종한’(10:3) 행태에서 찾고 있다. 그런 비판의 근거는 아주 분명하다! 즉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10:4)를 유대인들이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 일관되는 사도 바울의 이런 관점은 소위 ‘새관점 학파’의 친유대적, 친율법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반박한다. 기독교 신앙의 변함없는 든든한 기초는 ‘나사렛 예수를 당신은 누구라고 믿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에 있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올바른 대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은혜로운 계시’에 근거한다: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당신은 나사렛 예수를 누구라고 믿는가?’ 하는 바로 이 질문이 바울 당대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와 거치는 바위가 되었다(롬 9:33).

유대인들, 특히 그들의 지도자 격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삶은 대단히 종교적이었다. 여러 회당들에서 유대인들의 격심한 비판을 들었던 사도 바울이 그 유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설명할 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빌 3:6)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컨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800개가 넘는 세부 규정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면서 살아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이 바울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끌어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기 땅에 오신 언약의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도리’라고 확신하였다(요 16:1-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종교적 열정 그 자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그랬듯이, 지금 여전히 예수를 부인하고 배척하는 동포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있다고 냉철하게 진단한다.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당대 유대인들이 식사나 절기와 관련된 규정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종교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자의적 숭배와 거짓된 겸손과 지나친 금욕’으로 겉보기에는 경건하게 보일지라도, 참된 경건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골 2:16-23).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거듭 반복하여 선포된 영적인 통찰력이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서 종교적인 예배에 열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었던 ‘소돔’의 관원들,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지칭하였다(사 1:10). 그리고 그들의 열성적인 예배 행위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고 엄중하게 책망하였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주장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므로, 그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지도 보지도 않으신다고 타매하였다(사 1:15). 십계명에서 가르치는 참된 경건을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을 미워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라고 자처하는 현실을 보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무익한 거짓말’에 의존한다고 폭로하였다(렘 7:8-10). 종교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는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이지 제사나 예물과 같은 종교적 예전들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경건한 왕 다윗도 회개의 시편에서 잘 밝혔다(시 40:6; 51:16-17). 그 회개하는 심령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서 자신의 공의를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올바르게 깨닫는 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롬 10:4). 율법을 온전히 지켜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죄악됨으로 말미암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의 첫 단락에서 철저하게 밝혀주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전히 성취되었는데, 그 덕분에 ‘믿음으로 밀미암는 의’ 곧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선포된 것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없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라”(사 28:16; 롬 10:13)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도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그러나 곧이어 사도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다시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소식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다시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롬 10:16a).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대원칙에 따르자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을 통하여 널리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격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배제된 현실은 분명히 유대인들 자신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구약의 약속의 성취를 맛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불신실하신 까달이 아니다. 온 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른 그 복음을 듣지 못하였노라고 유대인들은 변명할 수 없다.  그들은 그 복음을 듣고도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제 버림을 받은 것인가?

  사도 바울은 우선 자기 백성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9장에서 옹호하였고,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10장에서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바울의 동포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이제 완전히 배제되었는가?  10장의 마지막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은 언약에 불신실하였던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탐구한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언약을 이루신 이 때에 그 언약의 약속을 받았던 유대인들을 배제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롬 10:19)는 모세의 예언이 무슨 뜻인지 이런 맥락에서 돌아본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참된 회개로 하나님께로, 그 거룩하고 복된 언약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촉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돌아본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 10:20-21). 사도 바울은 11장에서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소개한다.

   로마서 10장에서 우리는 참된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믿음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찾아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모두 성취된다’는 사도 바울의 교훈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제공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노중에서 깨우쳐 주신 진리도 동일하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고, 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올바르게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걸어갔던 잘못된 길, 즉 종교적인 열정으로 자기 의를 고취하는 왜곡된 신앙생활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힘써 부정하는 길에 우리도 빠질 수 있다. 대표적인 한 사례로 ‘그리스도와 무관한 성령 운동’을 들 수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성경에서 다양한 사역으로 소개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래로 오순절에 교회에 임하신 보혜사 성령께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에 보내주신 두 번째 보혜사이시다(요 14:16) 또한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일’이다(요 15:26).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사도적인 메시지는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두 번째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의 긴밀한 관계를 요약해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령충만으로 외치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희미해지거나 오히려 그 복음을 거스르는 갖가지 성령 운동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다가, 오히려 참된 그 의를 가리운’ 유대인들의 왜곡된 열정을 연상케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오늘날 기독교회의 올바른 경건을 확립하기 위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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