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로마서 9장 - 김진흥교수

기사입력 2019.07.11 10:1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김진흥교수.jpg▲ 필자인 김진흥박사는 Sydney Collage 교수로 재직중이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9-11장을 단지 하나의 ‘삽입부’ 혹은 ‘부록’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마틴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Jones)는 이 장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 장들을 특정한 문제들을 다루는 ‘일종의 추신’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반대 극단에 치우쳐서 로마서 9-11장이 로마서의 핵심이며, 나머지 장들은 단지 서론과 결론일 뿐이라고 여긴다. 스텐들 주교(Bishop K. Stehndahl)는 이 장들이 ‘로마서의 절정’이며, ‘진정한 중심’이라고 말한다. 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로마서 9-11장이 곁길로 빠진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논증 전개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며, ‘로마서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존 스토트, 로마서강해)

     

존 스토트는 로마서 9-11장의 주요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시한다:

1. 이스라엘의 타락(9:1-3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

2. 이스라엘의 잘못(10:1-21):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낙담

3. 이스라엘의 장래(11:1-32): 하나님의 장기적 계획

4. 송영(11:33-36): 하나님의 지혜와 관대하심

이런 구조 속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이 단락에서 ‘필수불가결한’ 핵심 토픽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로마서 전체의 일관된 주제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우선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네 가지 반박을 차례로 소개하고 논박하는 9장의 내용부터 시작한다.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자처하였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의 원래 당사자였던 유대인들이 정작 그 언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므로 그 언약적 축복에서 배제되어 있는 현실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골육의 친척들, 그의 형제들의 그런 영적 현실은 바울에게 ‘큰 근심,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다(9:1). 그래서 바울은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언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오해를 네 가지 질문들을 통하여 불식시키고 있다. 

 

1. 이스라엘에 언약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폐해진 것인가? (9:6-13)

‘유대인들이 정작 구약의 언약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배제된 것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실패하였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제기한 심각한 신학적 질문들 가운데 하나가 6절의 대답 속에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킬 수 없었다는 생각은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ai)이라는 성경의 일관된 계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그런 생각을 부정하고, 유대인이 기독교회 밖에 버려진 현실을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언약적 칭호에 대한 구약 자체의 교훈을 통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과연 누구인가? 당대의 유대인들이 주장하듯이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좀더 깊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혈통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사실(9:8)을 이삭과 에서와 야곱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주장한다(9:6-13). 혈통으로 이스라엘 백성 자격을 따지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은 인정하지 않으신 것(7절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과 또한 이삭의 혈통으로 태어난 ‘에서는 미워하였다’(13절)라는 말씀과 배치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되는 자격을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찾았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1). 에서와 야곱의 사례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예시하는데, 그들 자신의 어떤 행위와 무관하게 즉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되는 특권이 주어졌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참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되고, 그분을 배척한 혈통적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는 바울 당대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그 백성 이스라엘에 관하여 약속하신 바를 어기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2.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일은 불의한 일인가? (9:14-18)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9:14)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아브라함의 혈통과 같은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주권에 따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잘못되었는가 하는 반문이다. 이 질문은 할례와 율법과 음식 및 절기 규정들을 하나님 백성의 구별되는 특징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를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강력한 반발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지난 세 차례의 선교 여행에서 동포인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힐문을 여러 차례 받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 외에는, 혹은 자신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그런 특권들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미 로마서 9장의 첫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이 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그 가장 두드러진 사례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구약의 사례를 증거로 들었다. 그런 선택을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불의한 일인가?

‘그럴 수 없다!’라고 사도 바울은 곧바로 반박한다. 이 두 번째 단락에서 바울은 모세와 바로의 사례를 들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9:15)라는 말씀은 출애굽 이후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빠진 광야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곡하게 중보기도하였던  모세에게 주셨던 교훈이다(출 33:19).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주야를 보내는 동안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를 지키시지만, 목이 곧은 그 백성과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가지는 않으실 것을 선언하셨다(출 33:3).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은 약속하셨으나, 참된 영적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신 이 선언을 모세는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여겼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33:16). 이런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그 은혜로운 언약을 새롭게 해 주시면서, 그러나 동시에 은혜를 베푸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모세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선택은 모세와 대조적인 자리에 있었던 애굽 왕 바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적용되었다. 완악한 마음으로 끝내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바로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 회개할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다. (출애굽기와 로마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자신의 분명한 선택에 의하여, 바로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섰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과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모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우리의 책임이 무시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우리가 행한다면, 왜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시는가? (9:19-29)

세 번째 반론은 앞서 바로의 사례와 더불어 자주 제기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아홉 차례에 걸쳐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셔서 끝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적대하게 하셨다면, 그 책임을 바로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9:19)라는 반론은 바로 이런 사례를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및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오래된 문제에 직결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반문에 대하여 세 가지 주제로 대답한다: 첫째, 토기장이 비유를 통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신 사실과 타락한 인간의 무자격함을 예정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기초로 제시한다(9:21).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보이시고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이시려 할 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구원 얻을 자격이 없으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용을 받는 것은 그야말로 그분의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그 선택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무슨 말을 하리요!”(9:23)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한과 자유로운 뜻에 따라,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긍휼의 그릇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9:24).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바울은 이미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편견을 깨뜨리고 ‘내 백성이 아니라한 그곳에서’ 자기 백성을 부를 것을 알리셨다고 지적한다(9:26).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그 예정의 실행과 관련하여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신실한 남은 자’(faithful remnant) 사상으로 강조한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9:27). 기원전 8세기에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두 선지자 이사야와 호세아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그 언약 백성의 순종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 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항상 의로우실 것이며, 이스라엘이든지 다른 열방이든지 모든 죄악을 공의롭게 심판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그 의로운 율법을 어기는 악한 삶을 살아간 결과 언약 백성에서 잘려나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하였다. 오직 ‘신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언약을 지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만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셋째, 그런 남은 자들의 존재 역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한 것임을 사도 바울은 잊지 않고 언급한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29).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 풍성히 내려주셔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불에 소멸되지 않게 하시는 은혜의 섭리를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칭의에서뿐 아니라 성화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힘입어 설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마땅히 ‘하나님의 풍성하신 영광’을 찬양하는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9:23).

 

4.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9:30)라는 9장의 마지막 질문은 마치 설의법(設疑法)적 질문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주요한 교리적인 질문들을 논박한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sola fide)의 진리를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외모로 판단하면, 곧 혈통과 할례와 율법과 예전과 같은 것에 기초하여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였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곧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고,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된 현실을 설명해주는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걸림돌에 있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고, 결코 온전하게 성취할 수 없는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행위의 의’를 추구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9:31-32). 그 반대로 외모로는, 자신의 선행으로는 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던 자들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응하는 것을 체험하였다(9:33).

 

로마서 9장은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소식이지, 우리들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성경은 초지일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종종 ‘나의 구원’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문제로 여기지만, 성경은 항상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고 일깨워준다. 칼빈 선생은 자신의 구원에만 골몰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소홀한 신학은 잘못된 신학이라고 타매하였다. 같은 마음으로 청교도들은 대소요리문답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정 교리’를 깊이 묵상할 때, 바로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이라는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저작권자ⓒCTMNews & ctmnews.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상로 102 3층(초량동) | 인터넷신문등록번호:부산광역시 아00096 등록일자:2011.07.25

발행인/편집인 : 김성철,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종철 TEL : 070-7565-1407 FAX : 051-462-6698  | e-mail : ctmnews@ctm.kr

Copyright ⓒ 2011 http://ctmnews.kr All right reserved.

CTM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