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로마서 7장 - 김진흥교수

기사입력 2019.03.2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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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흥교수.jpg▲ 필자인 김진흥박사는 Sydney Collage 교수로 재직중이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죽고 또 그와 더불어 어떻게 새생명을 얻게 되었는지를 배웠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로마서 6장은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은 이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율법은 환자를 살리게 하는 약이기보다 오히려 그를 죽게 만드는 독약과 같다는 말입니다(7:5). 이것이 로마서 7장의 대주제요 교훈입니다. 육적인 사람(육체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 율법이 오히려 그 사람을 치명적인 힘으로 공격하게 됩니다. 로마서 7장의 나머지 부분을 연구할 때, 우리는 율법 아래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고뇌를 헤아리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에서 사도는 그것을 요약하고 있습니다.”(앤드류 큐벤호벤)

   위에서 인용한 큐벤호벤의 말은 로마서 7장 전반부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장에서 두 가지 질문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두 번째는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영적인 갈등 문제이다. 첫 단락(7:1-6)에서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율법의 얽어매는 구속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에 두 번째 단락(7:7-25)에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오해를 불식시키고, 선한 율법의 거울에 비추어진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갈등을 조명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1.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해방(7:1-6)

   결혼 관계를 들어 율법의 효력에 관하여 설명하는 바울의 요지는 분명하다: 첫째, 죽음은 사람과 율법의 관계를 종결시킨다(1-3절). 둘째, 율법으로부터 풀려난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다(4-6절).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하여 율법의 역할은 이제 분명하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육신’(flesh, sarx) 곧 우리 속의 악한 본성에 따라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뿐이었는데, 율법은 그런 우리의 죄악된 정욕을 자극하였다(5절). 왜냐하면 우리의 악한 본성은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좋은 것을 싫어하고 도리어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을 즐겨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요약해 주신 대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명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에게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요약해 가르치듯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죄와 비참함(Sin and Misery)이다!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의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는 ‘죄의 삯은 사망’(6:23)이라는 판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6:5)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비참한 영적 현실을 분명하게 요약해준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로 들어온 그리스도인은 ‘율법 조문을 자신이 다 지켜 의롭게 되려는 옛 방식’의 억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에 따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새롭고 신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7:6).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 일과 관련하여, 이제 우리는 율법의 조문들을 다 지켜야만 한다는 억압에서,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에서, 벗어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희생의 삶을 통하여,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그런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셨다!
 
2. 선한 율법과 악한 우리의 옛 본성(7:7-25)

   로마서 7장의 첫 여섯 구절은 마치 바울이 율법을 대단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십계명’을 핵심으로 한 구약의 율법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구약성경의 율법을 기본적으로 대단히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자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시작되는 7절부터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확고하게 반박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약하는 로마서의 흐름을 따라 가면, 사도 바울은 6장의 내용에서 곧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8장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비판하는 유대인들의 반론을7:7-25 단락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존 스토트 같은 주석자는 로마서의 이 부분을 ‘롬 7:6과 8:1 사이에 낀 삽입구’라고 보기도 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우리 자신의 정체를 올바르게 깨닫게 한다. 율법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죄인인  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갔을 것이다(7절). 율법은 본래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 위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다(8절). ‘율법도 계명도 모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12절).
   그런데, 그처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율법이 마치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인식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율법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13절). 죄가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선한 율법 탓이 아니라 죄악된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13-20절까지 역설하고 있다. 이 단락은 앞선 단락의 논의에서 빠진 듯한 논리의 연결점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율법은 사실상 죄인들에게는 그들의 피할 수 없는 결과 곧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를 분명하게 깨우쳐 주기 때문에,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된다는 것이냐?’ 하는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글라스 무에 따르면,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마치 ‘종교적으로는 경건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한 유대인’의 개인적 고백의 형식을 빌어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율법의 기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6-18) 사도 바울은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과 맺은 ‘생명의 언약’(혹은 ‘행위 언약’)을 더 이상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게 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1-24). 이처럼 인간의 타락의 중요한 한 가지 본질은 ‘무능력’이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여도, 우리의 본성은 그것을 선택하려 하지 않으며, 행하지 못한다. ‘죄가 너를 삼키려고 하니, 너는 죄와 맞써 싸워야 한다’(“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벨을 살해하였던 가인처럼,  타락한 인간의 죄에 사로잡혀 있다. 악을 원하지 않고 도리어 선을 행하길 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선을 행하는 데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및 칼빈이 (14, 23, 25절 등에 근거하여) 해석하듯이, 여기서 묘사된 ‘곤고한’ 사람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그 자신의 능력으로’ 지켜서 죄의 세력에 대하여 승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바울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울 그 자신, 경건한 유대인, 그리스도인, 혹은 다른 누구? 이것은 우리에게 궁금한 질문일 수 있지만,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리고 바울의 핵심 주장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의 율법이 죄라고, 혹은 잘못된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죄인은 항상 자신의 잘못을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리려는 본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악된 본성이 율법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현실을 두고, 그 율법을 탓할 수 는 없다고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처럼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의 영적 현실을 올바르게 깨우쳐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된 자로서 본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기 때문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율법은 여전히 의롭고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일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그 백성된 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과 뜻을 가르치며,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율법에 관한 내용을 두 군데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이런 율법관을 균형있게 반영하고 있다. 첫째,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죄를 깨닫고 구원의 유일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영적 교훈을 제2주일의 세 문답들을 통하여 깨우치기 시작한다.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된 율법의 핵심 요구(4문답)를 타락한 인간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5문답). 그리고 제4주일에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타락의 결과를 통하여 설명하고, 그 불순종과 반역에 대한 공의로운 형벌을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참 인간이고 의로운 분이며,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난’ 유일한 중보자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합니다(15, 18문). 그런 다음, 십계명에 관한 본격적인 해설은 ‘감사의 삶’(Gratitude)을 설명하는 제3부에서 소개되는데, ‘옛사람이 죽고 새사름으로 사는’ 진정한 회개(88-90문답)의 중요한 내용인 ‘선행’을 설명하면서 십계명이 언급됩니다: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만을 선행이라 한다’는 91문답의 해설에 이어 제34-44주에 걸쳐 십계명을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회의 강단에서 십계명은 계속하여 중요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전의 한 순서로 십계명을 교독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교리문답에서 중요하게 다룬 것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감사하는 삶의 규칙으로서 십계명은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는 그 대원칙에 따라 바르게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것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의 선함과 우리의 악함을 대조하여 강조한 사도 바울의 본뜻에 부합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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