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로마서 5장

기사입력 2019.01.2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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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c593f0d38b703c8ae787ddac5e1328_1mQZ8ikCotNuHGODBmoU5NR.jpg▲ 필자인 김진흥 박사는 Sydney Collage of Divinity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한 수단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첫째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5:5b)는 말씀에 나타나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두 번째이자 객관적인 방법이 있다. 곧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그분의 사랑을 입증하셨다는 것이다…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 선물이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 지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지에 의해 측량할 수 있다…이러한 기준에 따라 재어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유례가 없는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죽도록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분은 심판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바로 자신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1절부터 ‘율법 외의 하나님의 한의’를 증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신실한 사역을 신뢰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길이었다. 4장에서는 그 새로운 의의 길이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증거하였던 것으로서(‘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의를 인친 사실과 값없이 은혜로 베푸시는 사죄를 찬양하는 다윗 왕의 고백으로 확증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은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준수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결코 자랑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자랑할 수 없다,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는 표현을 거듭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5장에 들어와서 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를 확증하면서 사도바울은 세 차례나 그리스도인이 ‘자랑한다’(kauxáomai)고 거듭하여 강조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뻐하다’라고 번역된 이 동사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한다’(2:23),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지만(4:2) 에서 사용될 때에는 ‘자랑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5장에 세 차례 반복하여 사용된 이 동사를 앞선 구절들과 동일한 의미로 ‘자랑하다’라고 해석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에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무엇을 자랑하는가?
 
1. ‘자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라’
로마서 5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 부분인 5:1-11에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면서 세 차례 ‘자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자랑하며’(5:2), 우리의 고난 안에서 ‘자랑하고’(5:3),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랑한다’(5:11). 이런 자랑들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근거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특권과 그것에 따르는 여러 가지 것들을 자랑하였다. 헬라인들은 그들의 철학과 지혜와 웅변을 자랑하였고, 또 다른 이방인들도 각기 그들 자신의 것들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구속을 자랑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도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렘 9:24)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5:2) 심지어 환란 속에서도 자랑하는(5:3) 근거가 된 이신칭의의 교리를 사도 바울은 5장의 전반부에서 다시 한 번 뛰어나게 요약하여 설명한다(5:6-11). 그 핵심 구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는 말씀이다.

이 단락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은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5:9a). 달리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지하여, 죄인인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하나님과 더불어 ‘평강’을 누리는데, 8장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축복인지 탐구하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칭의는 ‘미래’에 닥쳐올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확실하게 구원한다고 가르친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5:9b).
NIV 영어성경번역은 9절 하반절을 상반절과 비교하면서 강조하는 말로 시작한다: ‘더욱’(how much more).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shalom)을 누리며 그분과 교제할 자격을 갖춘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차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보장한다. 그런데 그 미래의 구원을 보장하는 근거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로 말미암아’(through him)!  이 구절은 기독교신앙을 처음 가질 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 평생의 선행의 삶을 통한 ‘행위의 의’로 구원에 이른다는 모든 종류의 주장을 명쾌하게 반박한다. 사도 바울은 롬 5:9에서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달려있다고 확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파에서 즐겨 주장하는 ‘이중 칭의’는 사실상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바울 자신이 주장한 새로운 관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면, 바울에 관한 이런 ‘새 관점’은 오늘날에 등장한 새로운 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반동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1545년부터 시작된 트렌트 공의회를 전후하여 로마 카톨릭신학의 ‘챔피온’으로 인정되었던 온건하고 진보적인 신학자 피기우스(Albert Pighius, 1490-1542)는 이미 ‘이중적의’(double justification)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의 ‘형식적 원인’이 되지만, 각 사람의 ‘내재적의’는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7성례를 비롯한 은혜의 수단들에 의하여 각 사람의 ‘내재적의’가 충분하게 자라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마틴 부처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진영과 콘타리니 추기경을 대표로 한 로마 카톨릭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교리적 일치를 추구하였던 레겐스부르크 회담(1541)에서 제시된 ‘이중적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로퍼(Johannes Gropper, 1503-1559)라는 로마 카톨릭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주입’하시고, 그에 뒤따르는 성화의 삶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의가 ‘추가’되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결과 불가피하게 신자들의 삶에서 순종이 뒤따른다고 가르친 종교 개혁자들의 로마서 이해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입장이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경의 교훈대로, 소위 오늘날의 새 관점 학파에서 말하는 ‘이중적의’는 이미 종교개혁 시절에 로마 카톨릭의 온건파에서 제시되었던 바로 그 개념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이런 주장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의 말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의 증명이 바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때, 즉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보내신 사실’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의 확실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고, ‘고난 속에서도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전반부에 요약된 ‘이신칭의, 오직 은혜’의 교리를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한 가지 예화를 소개한다. 이 예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덕택에 현재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뿐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때에도 바로 그 예수님 덕분에 공의로우신 재판장의 진노로부터 확실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롬 5:9의 말씀을 잘 설명해준다.
 
“호주 사람들은 오지의 들불(bushfire)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주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땅을 찾아 중서부의 완만한 평원들을 가로질러 갔던 미국의 개척자들이 맞닥뜨렸던 위험도 바로 그런 들불이었습니다. 대초원의 수풀들은 어른의 키만큼 높이 자랄 수 있었고, 여룸철이 되면 대초원은 건조해졌고 또 위험해졌습니다. 여름철에 찾아 든 폭풍들 중에서는 비는 내리지 않고 다암 천둥과 번개를 통반하는 ‘마른’ 폭풍도 있었습니다. 번개가 대지를 내려치면, 그 마른 수풀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대초원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 개척자들이 무거운 포장마차들을 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척자들인 이런 치명적인 위협에 담대하게 맞섰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들불이 발생하면 그들은 바람을 등지고 그 자리에 멈추어섭니다. 그리곤 그들 앞쪽에 이리저리 불을 내어, 몇 분 안에 널찍한 불탄 공터를 만들어냅니다. 바로 그 넓은 불탄 공터에 개척자들은 가족들과 포장마차들을 옮겨서, 안전하게 저 뒤에서 다가오는 들불을 기다립니다. 들불은 이미 불탄 지역을 두 번 반복하여 태우지 않습니다. 이미 불에 탄 그 공터는 다시 불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최선의 노력도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불길이 타올랐던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격렬한 심판이 이미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던 십자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면, 우리는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곳에서 안식처를 찾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Steve Cree & Dave Thurston, Back to Basics)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변함 없는 교훈이 이것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이신칭의와 오직 은혜의 진리를 알고도 오히려 방자한 마음으로 감사치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나, 그러한 방종을 비판하면서 우리 자신의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에 덧붙이려고 하는 자는 모두 다 ‘사랑과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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