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로마서 4장

기사입력 2019.01.1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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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c593f0d38b703c8ae787ddac5e1328_1mQZ8ikCotNuHGODBmoU5NR.jpg▲ 필자인 김진흥 박사는 Sydey Collage of Divinity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3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곧 구약성경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세우느니라.’ 이제 4장에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이 과거에 이미 계시하였던 것처럼 실제적으로 어떻게 구원의 방법을 구체화하는 지 보여줄 것입니다. 그가 중요하게 제시하는 사례는 그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경우입니다.” (앤드류 큐벤호벤)
 
1.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새 관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놀라운 체험은 사도 바울에게 그때까지 그가 믿었던 구약성경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였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였지만, 정작 구약성경이 그토록 중요하게 예언하였던 그 메시야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박해한 사실은 바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자로 여겼는데, 실상은 바울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박해하였던 바로 그분이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신 18:15)이며, 다윗이 ‘나의 주’(시 110:1)라고 불렀던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사 52:13-53:12)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사탄의 노예상태로 전락한 인류를 회복하러 오신 ‘두 번째 아담’(롬 5:15-19)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바로 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당대의 유대인들이 듣기에, 이러한 바울의 메시지는 그들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을 뒤집어놓을 정도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밝은 빛으로 비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처음 깨달았을 때부터 혁명적이었다. 바울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신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세워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토록 큰 소망을 품고 열심히 실천하였던 율법의 길이 실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주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 율법은 오히려 선행을 추구하는 모든 자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죄의 필요성을 깨우쳐 줄 뿐이라는, 유대인들의 귀에 심히 거슬리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회당에서 바울의 복음전도를 들은 유대인들에게 한층 더 충격적인 메시지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풀어 주신 새로운 길, 즉 ‘율법 외의 또 다른 의’가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는 선포였을 것이다. 바울이 전한 그 복음에 따르면, 할례나 식사 규정이나 절기를 지키는 등의 율법의 선행이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난 언약백성이라는 특권적 지위가 아니라, 오직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Justification)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그 자신이 속하였던 유대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언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배신자이자 이단자로 보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열심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노심초사 하였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하였던 바울은 곳곳에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열심으로 박해하였던 괄괄한 유대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구약성경을 들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박하는 주장에 대하여 로마서 4장에서 다시 한 번 논박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바울을 힐난하였다: ‘만일 칭의가 율법과 무관하다면, 율법은(구약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금 바울 당신은 율법을 쓸데없는 잡동사니라고 말하고 있는가? 구약성경 전체가 시간낭비였고, 이제 이 새로운 가르침에 의해 휩쓸려나가 버려야 하는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로마서 3장의 이 구절은 선교사역을 통하여 무수하게 제기된 유대인들의 반론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분명한 대답이다. 3장 후반부의 내용에 이어 4장에서 바울은 바로 그 구약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 유대인들의 반박을 바로 잡아준다.
 
2. ‘율법과 선지자의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의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이신칭의’의 진리에 대한 마땅한 반응으로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다’(롬 3:27a)고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3:27b-28).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게 되는 이 은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3:29-30). 이제 바울은 4장에서 복음의 핵심에 해당하는 이 메시지를 구약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들어 다시 한 번 확증하여,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운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3장 마지막 부분의 논증을 그대로 다시 반복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에 대하여 자랑할 수 없다’(4:1-2).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그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의 준수 덕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4:3-8). 그런데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겨진 것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며 할례는 단지 ‘믿음으로 된 의를 확인하기 위하여 인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의의 상속자에 포함된다(4:9-17). 이렇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복음의 메시지가 새로운 주장이나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아니라, 구약성경이 이미 예증한 진리라는 사실을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 언약의 실례를 들어 확증한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지기 훨씬 전에, 모든 참된 유대인들의 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을 통하여 ‘율법 외의 한 의’가 이미 뚜렷하게 증거되었던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한 또 다른 신앙의 영웅인 다윗의 시편이 그런 맥락에서 언급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이 인용한 시편 32편은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제7계명을 어기고, 나아가 그녀의 남편을 전장에서 차도살인하여 제6계명까지 범한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실한 종 다윗은 한때 신앙의 영웅(hero)이었으나, 이제 이런 추악한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 앞에 서면 자신의 선행을 주장할 수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zero)로 전락하였다. 다윗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sola gratia)의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것은 바로 이 겸비한 죄인의 시절이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다윗 왕의 이 고백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의 복’(4:6)에 관한 구약성경의 강력한 증거 구절로 인용되었다. 할례도 받았고 율법도 성실하게 준수하고 또 가르쳤던 경건한 다윗 왕의 고백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적 메시지가 바로 구약의 경건한 선진들에 의하여 증거된 ‘옛 진리’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께서는 이처럼 구약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러 오신 분이다!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신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으시며 의롭다 인정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만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에 속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미 로마서의 첫 부분에서 증명하였듯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3:23) 현실을 볼 때, 율법은 진노를 이룰 뿐이기 때문이다(4:15).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은혜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허락하신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에게 보혜 성령께서 깨우쳐주신 ‘새 관점’은 바로 이러한 ‘오직 은혜, 오직 믿음’(sola gratia et sola fide)의 복음이었다. 그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종교개혁자들은 일관되게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표적인 수도원장이었다가 으뜸가는 개혁주의 신학자가 되었던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는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구절(롬 4:3)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의로) ‘여기다’(logizein)라는 단어를 공로 혹은 부채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전가하다’(impute)라는 뜻이라고 확실하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전가’되는 것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며 혹은 빚으로 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오늘날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파는 바로 이 전가의 교리를 싫어하고 배척한다는 점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구약성경을 새롭게 깨달은’ 그 바울과는 다른 바울을 우리에게 소개하려 한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4장의 뒷부분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이었는지 깨우쳐준다. 로마서의 앞뒤에서 거듭하여 ‘믿음의 순종’을 강조한 것처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 없는 죽은 믿음’(약 2:17, 26)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사례를 인용한 바울과 야고보가 마치 서로 상반되는 강조를 한 것처럼 해석하는 관점은, 로마서 4장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18-22).

이 믿음은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경박한 메시지가 말하는 종류(Believism)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굳게 붙잡는 전인의 반응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신뢰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믿음으로 (자신의 몸이나 사라의 태의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4:19)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를 기다렸고, 또한 그 약속의 씨앗인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4:17) 분이라고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믿음은 아브라함의 바로 이런 믿음이라고 권면한다. 그 믿음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우리 모두의 조건은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것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됩니다: 하나님은 불멸을 약속하시지만, 우리는 죽음과 부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다고 선언하시지만, 우리는 죄악들에 뒤 덮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며 우리에게 친절하시다고 친히 증언하시지만, 외적으로 나타나는 심판들은 그분의 진노를 위협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눈을 꼭 감고 우리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지나쳐버려야 합니다.”(존 칼빈, 로마서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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