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도서] 만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기사입력 2017.05.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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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김형국 / 생명의말씀사


사진 001.JPG▲ 정현욱목사는 10여개 출판사의 신간 서평단으로 황동하며 두란노 <생명의 삶 플러서> 집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모든 만남을 우연으로 보는 것과 기적으로 보는 것이다.”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만남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필연적 또는 불가항력적 만남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만남입니다. 가족과의 만남이 대표적입니다. 친구나 회사 동료 등도 여기에 포함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이 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30년 넘게 소식이 없던 친구를 만나는 것이나 유럽 여행을 갔는데 호텔 로비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할 만남들입니다. 그러나 우연이란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우연의 만남도 각자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만남은 두 인격의 교류이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람의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인간의 교양과 인간성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원래 의미는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고 합니다. 정치적이란 의미는 만나서 토론하고 합의하며, 생각과 사유를 나누고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과 ‘사회적 동물’이란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즉 인간은 ‘만남’이 없으면 인간으로서 구실이 불가능하며,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만남이 우연이든, 필연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사람이 되게 하셨고, 사람답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만남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하려 합니다. 김형국 목사의 <만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는 책입니다. 나들목교회를 섬기는 김형국 목사는 이 책을 통해 인생에서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만남이 바른 만남인지 알려 줍니다. 진정한 만남은 결국 진리와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촌구석 목수 출신인 젊은 예수는 성별, 지위, 연령,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났습니다. 그들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무엇이 필요한지 꿰뚫어 보았으며, 적실한 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 만남이 실제로는 일생일대의 소중한 만남이었으며, 그래서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11쪽)
만남의 결과는 변화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만남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짓된 만남은 타인을 수단화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필요적 존재로만 상대합니다. 진정한 만남은 나의 것을 버리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채웁니다. 영혼의 공유와 교환이 일어납니다. 이 책은 삶의 현장 속에 찾아오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만나지않으면변하지않는다.jpg  고통과 슬픔의 심연 가운데 있는 나인성 과부, 영원한 생수를 찾아 헤매는 사마리아 여인, 허망한 성공의 사닥다리 앞에 있는 삭개오, 진리 앞에 텅 빈 내면을 비춰보는 니고데모, 지칠 대로 지친 일상 속의 당신 베드로, 그리고 지금 바로 당신. 여섯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지만 모든 사람입니다. 김형국 목사는 여섯 명의 성경인물을 통해 예수님과의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뇌와 아픔을 간직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나인성 과부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고, 삭개오와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하지만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살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 좋습니다.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를 두 사람만 집중적으로 살펴봅시다.


1. 나인성 과부 : 아무도 모르는 고통 가운데 있는 여인

  삶은 고통입니다. 살아있다면 고통은 평범한 것입니다. 그런 유독 더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저자는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껍데기만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 세상’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타인의 눈에는 영웅처럼 보이고, 인기를 누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고통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자의 친구 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며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듯하지만 친동생은 형을 보며 늘 아픈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사회 속에도 감추어진 아픔이 있습니다. 바로 나인성 과부가 그랬습니다. 로마의 정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과도한 망상에 사로잡혀 헛된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절망하며 무덤으로 가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부였던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가 이 여인에게 다가갑니다. 인간의 고통 중에서 최고의 고통이라 할 수 있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과부에게 예수가 다가갑니다.”(28쪽)
과부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아라.’ 그리고 관에 손을 얻습니다.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율법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예수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부정해졌습니다. 죽음과 생명이 치환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하는 예수 오심의 목적입니다. 예수는 생명이시면서 죽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으셨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가 죄인들의 죽음을 대신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건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속을 의연하게 걸어가도록 돕’(45쪽)는 종교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만남은 치유와 회복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는 절망의 자리에 찾아가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2. 삭개오 : 무한 경쟁, 전쟁 같은 삶에 무너진 당신
  두 번째 사람을 찾아가 봅니다. 그는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입니다. 제가 삭개오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성공을 향해 질주는 현대인을 너무나 닮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란 이름의 뜻은 ‘순결하다’입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순결’은 역설적입니다. 그는 이름과 다르게 순결하지 않았고,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 친구와 가족,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떠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삭개오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외로웠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경계하고 경쟁자로 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영혼은 피폐해졌고, ‘공허’(98쪽)만 남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 성공을 향해 질주했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영혼 없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운집했지만, 예수는 한 사람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을 부릅니다. 외모나 직위나 현재 상태로 부르지 않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110쪽)
  예수는 삭개오에게서 모든 과거의 현재, 미래를 삭제시키고 단지 그의 이름만 불렀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삭개오를 찾아온 것입니다. 삭개오를 비판하거나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삭개오라는 사람 자체를 받아들였습니다. 적자생존의 경쟁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현대인들은 살기 위하여 삶의 속도를 높이지만 오히려 삶의 질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경쟁자들과 성취하고 소유하려는 것들만 바라보다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핸드폰에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있지만 위기의 순간,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못합니다. 모두가 친구인 사람은 아무도 친구가 없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삭개오를 찾아왔습니다. 아무 조건도 달지 않는 ‘친구’로 찾아왔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친구조차 없는 사람에게 친구로 찾아온 예수, 삭개오는 그런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111쪽)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남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판단하며 이유를 가지고 접근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만남을 수단으로 뭔가를 얻으려는 꼼수입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이런 만남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면 만남 자체보다 왜 나를 만나려 하는지 의심부터 합니다. 그들의 저의(底意)를 밝히고 대처를 해야 합니다. 만남은 피곤해지고, 피상적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한 사람으로 찾아갑니다.
“예수는 지금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단독으로 만납니다. 그의 원래 가치를 다시 찾아주고 기꺼이 친구가 됩니다.”(112쪽)
삭개오와의 만남은 그의 이름을 되찾겠습니다. 성공을 향해 폭주하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남으로 자신의 이름인 ‘순결’을 되찾았습니다. 이름은 곧 자신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결국 자신을 되찾는 것입니다.

3. 당신 :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두 명의 만남을 들어봤습니다. 마지막 만남은 ‘당신’입니다. 만남의 기저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인간들을 쫓아냈습니다. 이후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었고, 찾아 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처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보내시고, 선지자를 보내시며, 마지막 아들까지 보내셔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내는 천국의 초대장입니다. 그것을 받고 응한 사람들은 만남이 기적이 되고,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우연은 하나님의 섭리가 입은 옷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은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기적이 되어 삶을 변화 시킵니다. 한 사람은 한 세계입니다. 누군가를 만남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영원과의 만남이며 전부와 맞닥뜨림입니다. 유한한 나라는 존재 안에 무한을 담고, 찰나의 육신 속에 영원을 담게 됩니다. 이 책을 무료함과 권태에 빠져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고뇌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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