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루터와 칼빈의 일치와 차이(2)

심각한 결과들을 낳은 차이점들
기사입력 2016.11.0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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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결과들을 낳은 차이점들


안타깝게도 그 동일한 나무의 두 가지는 점점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자라갔습니다. 루터와 칼빈 사이의 관계를 두고 비교하면, 루터의 후계자들과 개혁파의 후예들의 관계는 일치보다는 차이를 더 두드러지게 보여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난 그 차이점들을 예배와 설교, 교회정치와 세속당국과의 관계에서 살펴봅시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유일하게 합의하지 못하였던 성찬교리는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점점 더 심각한 차이를 보였고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차이는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독일의 종교개혁이 농민전쟁으로 치닫게 된예상치 못한 사태 진전이 루터에게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고증이 상당히 잘 된 2004년작 ‘루터’(Luther 2004)라는 영화를 보면, 이 개혁자의 보수적 태도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루터의 보수주의가 칼빈의 개혁주의와 여러모로 대조되며, 그 결과들도 분명히 갈라집니다.

 

1. 교회정치 및 세속당국과의 관계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협약으로 신성로마제국(독일) 영토 내에서는 로마교회와 더불어 루터교회가 합법적인 교회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 제국국회에서 타결된 협약의 핵심은 ‘다스리는 자의 신앙’(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이었습니다. 즉, 작센 지방의 제후가 루터교회를 선택하면, 그곳에 사는 신민들은 모두 영주의 선택에 따라 루터교회를 선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에 따라 예배드릴 수 있는 다른 나라들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잘 알려진 역사적 사례로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개혁파 신앙을 채택하였을 때 그곳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고 주일마다 설교되며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쳐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가 다시 루터교로 돌아갔을 때,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를 비롯한 개혁파 신학자들은 모두 그 나라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이 원칙은 루터교회가 영주들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루터와 같은 강력한 영적 지도자들이 영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그러나 교회정치적 구조에 있어서 루터 교회는 계속하여 국가에 종속되었고 결코 독립적인 위치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루터는 교회 안에 본질적으로 단 하나의 직분만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말씀을 수종 드는 직분 곧 목사의 직분이었습니다. 교회의 행정과 권징은 세속 영주들의 손에 있었습니다. 

칼빈은 달랐습니다. 그는 교회적 사안들을 그냥 제네바 시당국의 행정에 맡겨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여긴 말씀의 봉사와 성례의 거행과 권징의 시행을 국가로부터 독립시키려고 줄기차기 노력하였습니다. 칼빈은 성도들을 이런 방향으로 양육하였고 그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열매로 나온 것이 교회의 네 가지 항존직분이었습니다: 말씀의 종으로서의 ‘목자’(herder)의 직분, 순수한 교리를 유지해야 하는 직분으로서 ‘교사’(doctor, 신학교수)의 직분, 말씀의 종들의 지도 아래 대중의 일치와 승인을 통하여 선택되어야 하는 ‘장로’(presbyter)의 직분, 그리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아보는 ‘집사’(deacon)의 직분.

이런 조직을 갖춘 개체교회가 지역별로 노회를 이루어 서로 신앙 안에서 협력하고 권면하는 체계가 종교개혁의 개혁파 전통에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조직과 실천에 있어서 루터교회와 비교되는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은 칼빈 이래로 개혁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동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개혁교회의 목사 한 사람을 제거하더라도 그 교회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 예배와 예전

루터의 보수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가 예배와 예전입니다. 그는 농민반란의 와중에 곳곳에서 벌어진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을 경험하였고, 그런 행위를 혐오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루터는 성경이 강조하여 ‘금지’하지 않는 한, 교회 안에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것들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교회에서는 제단(성찬상), 성인들의 형상들, 오르간 연주, 그리고 예배 전체를 여전히 ‘미사’라고 부르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루터 자신이 이것을 ‘원리’로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한다면, 그리고 당국의 지도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진다면, 그 역시 성상을 예배당에서 제거하는 등의 조치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보수성은 종교개혁 초기에 일어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염려가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의 추종자들이 왕왕 루터의 보수적 성향을 마치 원리적인 것으로 이끌어간 것입니다. 반면에 츠빙글리와 칼빈은 예배에서 오직 성경에서 강조하여 ‘명령’한 것들만 남겨두기를 원하였습니다. 올바른 신앙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으면 예배당 내외의 형상들을 모두 치워버렸고, 심지어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대성당에 있는 오르간마저도 (성도들이 그 소리를 천사의 소리로 곡해하였기 때문에) 닫아버렸습니다. 개혁파에게 예배는 차분하고 진지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을 유혹하는 것들을 배제하고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에 집중하는 예배 양식이 발전하였습니다.

예배와 예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초창기부터 이견을 보여온 성찬성례에서 나타났습니다. 루터와 칼빈 두 사람 모두 로마교회의 화체설(theory of transubstantiation) 및 그 교의와 밀접하게 연결된 ‘피없는 제사’로서의 미사 개념, 성체로 변한 떡과 포도주에 대한 숭배를 강력하게 정죄하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루터는 떡과 포도주가 그 본질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성찬에 현존한다는 공재설(theory of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습니다. 반면에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그 인간적 본성에 따라서는 하늘나라에 계시며, 우리는 성만찬에서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그 그리스도와 아주 친밀하게 연합되어 우리가 그분의 살 중의 살이 되며 뼈 중의 뼈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성찬 교리는 단순히 한 가지 성례에 국한된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관련된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연결된 중대한 사안인 것이 성찬논쟁이 지속될수록 분명해집니다. 부활 승천 이후에도 영원토록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신앙고백의 의미가 강조되면서, 사도신경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고백이 서로 달리 해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비록 유한한 인성과 결합되어 있으나 결코 인성에 한정되거나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칼빈과 개혁파 기독론의 독특한 견해(extra-Calvinisticum)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 인성도 함께 있지 않다면, 두 본성은 분리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칫하면 단성론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루터의 성찬론 및 기독론의 오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가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칼빈과 개혁파의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3. 설교의 메시지

두 개혁자 사이에는 ‘설교의 내용’에 관해서도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근본적인 일치가 전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충만하게 설교하기를 원한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동일한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길(pilgrimage)로 묘사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런 삶의 특징이라고 가르친 것,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회개와 장차 올 영원한 삶을 묵상할 것을 요청한 점에서 두 사람의 메시지는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렇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터에게는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 3:24)의 역할 이외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에서 해방된 신자는 마땅히 선한 일들을 하게 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반면에, 칼빈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의 또 다른 의의를 강조하였습니다. 소위 율법의 세 가지 용도, 곧 교육적 용도(usus paedagogicus), 정치적 용도(usus politicus), 그리고 규범적 용도(usus normativus)의 구분은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고 보았던 칼빈의 강조점을 부각시킵니다.

칼빈에게 설교는 루터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큰 일로서, 삶 전체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와 법질서의 회복과 유지, 가정과 일터, 교회와 일터, 법원과 행정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질서와 관한 메시지가 설교의 내용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과 세상적인 통치의 영역을 구분하는 쪽에 가까왔습니다. 사회를 ‘기독교화’한다는 생각은 루터에게는 친숙하지 않았습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적인 사회 구조 혹은 경제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칼빈에게는 두 왕국이 아니라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의 왕국’이 강조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관계에서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정신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칼빈은 ‘세상을 멸시할 것’(contemptio mundi)과 동시에 ‘세상을 받아들일 것’을 동시에 강조하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사도 요한의 권면은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과 동등하게 강조되었습니다. 여기서 츠빙글리에게서 칼빈에게로 이어지는 개혁교회의 특징적인 언약 신학의 강조점이 나타납니다. 본질적으로 칼빈과 개혁주의는 두 왕국이 아니라 한 왕국, 하나의 신적 통치, 여러 세기를 거쳐 진행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단일한 전개, 하나의 구원역사를 가르쳤습니다. 신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분야들에 대한 관심, 정치와 사회와 경제 관계들에 대한 칼빈주의의 지속적인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워필드 박사가 칼빈의 신학적 사고방식을 ‘귀납적 사고’(a posteriori)로 표현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칼빈의 귀납적 방법은 성경의 주석으로부터 출발하며, 항상 새롭게 그 주석에 의하여 평가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칼빈은 어떤 특정한 원리에 의하여 세워진 논리적 신학적 체계에 따라 생각하고 가르치고 글을 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칼빈 신학에서 예정론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도 성경이 강조하는만큼 충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신앙의 확신과 그에 따른 심령의 평안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사역에서 오는 칭의에서 찾았지만, 그와 동시에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적인 성화의 필요성을 성경의 교훈대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예정론은 칼빈의 ‘성경중심적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예정론은 너무나도 자주 오해와 비판에 시달렸습니다. 루터교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칼빈과 가까왔던 멜랑히톤조차도 예정론을 스토아학파의 숙명론적인 사고방식에 빗대어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분명히 예정에 관하여 가르치므로, 말씀의 종은 그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당크바르 박사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칼빈의 신앙은 참된 신-학자(theo-loog)의 경외심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참된 신-학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na-denken)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게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 선택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 개혁자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찬양하며, 유기에 대하여 고심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공의에 몸을 숙인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라고 칼빈의 계시의존적 사색을 칭찬합니다(W.F. Dankbaar, Calvijn, zijn weg en zijn werk, 1957).

반면에 1580년에 출판된 루터교의 신앙 규범인 ‘일치의 책’(the Book of Concord)는 ‘예정론’을 다루는 항목에서, 하나님의 예지와 그분의 선택을 구분하고, 이중예정설을 배척하며,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버려두심은 예지와 관계될 뿐이라고 규정합니다. 개혁교회에서 아르미니우스 논쟁이 일어났을 때, 루터파 신학자들은 그 항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정에 관한 한, 두 교회는 칼빈과 루터 사이의 거리와 비교할 수 없이 더 멀어졌습니다. 

 

4.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항거의 권리

독일농민전쟁을 겪으면서 루터는 피지배층의 정당한 요구를 인정하면서도, 반란이 초래한 사회적 무질서를 더 크게 우려하여 지배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루터는 신민들의 반란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도 칼빈처럼 하급 귀족들이 상급 귀족들에 대하여 갖는 일정 정도의 고유한 권한을 그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쉬말칼덴 동맹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황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기본적으로 루터는 신민들을 부모의 권위에 순종해야 할 자녀들로 간주하였습니다. 자녀들로서는 항의하는 일까지는 허용되지만 그 이상의 반항은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칼빈 역시 분노한 신민들이 제멋대로 봉기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디도서 3:1-2에 관한 설교에서 ‘만일 우리가 터어키 인들의 지배 아래, 폭군의 지배 아래, 복음의 철전지 원수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로 칼빈의 견해가 다 표현된 것은 아닙니다. 우선 그는 정부당국이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는 것을 명령할 때에는 결코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같은 ‘공공연한 구원자들’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칼빈은 지적하였습니다. 좀더 의미심장한 언급은 ‘기독교강요’에 나타납니다:

“만일 지금 임금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민중의 관리들이 세워진다면 - 예컨대 고대 스파르타의 왕들에 대립하여 설치된 ‘에포르’(ephor)와 같이 … 그리고 아마도 현재 각 나라의 국회가 중요한 회의를 열 때 (성직자, 귀족, 시민이라는) 세 신분이 갖는 권한과 같은 것이 있다면 - 나는 그들이 왕들의 횡포한 방종에 대하여 그들의 의무에 따라서 항거하는 것을 금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임금들이 폭정을 베풀고 가련한 민중을 괴롭힐 때에 그들이 그것을 못본 체 한다면, 오히려 나는 그들이 이 범죄적인 불신실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민중의 자유가 위협을 받을 때에 (그들을) 배신하였기 때문이다”(IV.20.31).

이런 사상에 따라 칼빈은 자신의 조국 프랑스의 위그노파(the Huguenot)가 정부 당국의 감당할 수 없는 압박과 박해에 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을 때, 큰 주저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위그노 전쟁이 현실화되었을 때, 칼빈은 프랑스의 개혁파 귀족들이 신앙의 사유로 박해당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제네바에서 위그노를 모집하는 일을 허용하였습니다. 독재자에게 저항할 자연적 권리를 인정한 칼빈의 견해는개혁주의의 전통이 되어서, 네덜란드의 80년 독립전쟁에서도 칼빈주의자들이 핵심인물들이 되었고, 영국의 청교도 혁명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차이에서 박해로

지도자들이 호의적으로 양해할 수 있었던 작은 차이들이 그 후계자들의 손에서 확대되고, 급기야는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핍박하기까지 하는 마음 아픈 일들이 종교개혁 진영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1553-4년의 겨울,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의 추방 조치로 망명하게 된 개혁파 신자들이 덴마크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루터파 교도인 국왕 크리스티안 3세의 호의를 기대하였지만 비참하게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아 라스코(Johannes à Lasco)는 국왕에게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그보다 한 주 앞서 국왕의 궁정설교자인 노비오마구스(Noviomagus)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저주를 받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결국 국왕은 그 개혁파 망명자들이 덴마크 국가교회의 교리와 예전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만 그들의 정착을 허락하였습니다. 신학적 토론을 요청한 아 라스코의 건의는 거절되었고, 개혁파 신앙을 고수하는 망명자들은 지체 없이 그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거친 겨울철에 아무 덮개도 없는 배에 가족들을 태우고 다시 얼음으로 덮인 바다로 나아가야 했던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준 루터파 국가의 항구 도시는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함부르크에서는 냉엄한 루터주의자 요하킴 베스트팔(Joachim Westphal)이 이 개혁파 망명자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당국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탈진한 그 망명자들이 가까스로 정착한 곳은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의 엠덴이었습니다. 로마교회에 박해 받고 추방 당한 하나님의 교회, 같은 종교개혁의 뿌리를 둔 루터교회한테서조차 냉대와 멸시와 추방을 겪은 개혁파 망명자들이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루터파의 중심적인 인물들은 독일 내에서 개혁파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카스파르 포이커(Kaspar Peucer)에게 일어난 일을 들어봅시다. 그는 멜랑히톤의 양자로서 멜랑히톤이 죽은 후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이커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개혁파 쪽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선제후는 그것을 루터주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즉각 포이커와 그의 동료들은 체포되었습니다. 그 중 일부는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12년 형을 받은 포이커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당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를 ‘개종’시키기 위하여 로마교회의 종교재판소의 방법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들이 행하여졌습니다. 포이커는 60세가 된 선제후가 13세의 공주인 아그네스 헤드비히와 재혼하였을 때 석방되었는데, 그것은 이 공주가 포이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루터교도들은 그 해에 주조된 동전에 ‘아담이 하와의 충고를 따르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였다’는 글과 그름을 새겨넣었습니다.

1581년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크리스티안 1세가 작센의 선제후가 되었을 때, 그의 재상인 니콜라스 크렐(Nicolaas Crell)은 루터파 제후들이 프랑스의 위그노와 연합하여 신성로마황제에게 대항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루터교도들은 유아세례식에서축귀의식(exorcism)을 제거하려는 크렐의 주장을 들어, 그를 은밀한 칼빈주의자(crypto-Calvinist)로 비난하였고 그 결과 엄청난 대중적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원래 루터교회는 세례 때에 특정한 행위를 통하여 그 자체로는 부정한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귀신을 추방하는 일을 표현하는 로마교회의 이런 관습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의식을 철폐하는 것은, 그 당대의 사람들의 생각에,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칼빈주의’에 접근하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크리스티안 선제후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자, 크렐은 그 장례일에 투옥당하였고 사형 판결을 받아 참수되었습니다. 그의 목을 자른 칼에는 ‘그대 칼빈주의자여, 주의하라!’(Hüte dich, Calvinis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16세기의 후반부에 루터의 나라에서, 곧 한 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하여 그토록 용감하게 싸웠던 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

마틴 부처와 같은 개혁자들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의 하나됨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교회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덮어버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루터파 신학자들의 오만하고 배타적인 태도는 교회의 일치를 바라는 사람들을 거듭 낙심케 하였습니다. 루터 사후에 일어난 루터 교회 내부의 여러 가지 신학논쟁들의 와중에서 - 멜랑히톤조차도 ‘신학자들의 성가신 비판과 미쳐 날뛰는 소리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할 만큼 격렬한 논쟁들의 와중에서 - 종교개혁의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의 가지들은 안타깝게도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 말하는 교회의 네 가지 본질(one holy catholic apostolic) 가운데 제일 먼저 언급되는 ‘하나됨’을 포기하는 것은 분파와 유사교회의 특징일 뿐, 결코 참된 기독교회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을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루터교회와의 일치가 난망하게 되었지만, 개혁교회 안에서라도 신앙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당대의 가장 존경받던 두 개혁교회 지도자들 곧 불링거와 칼빈 사이의 신앙적 일치를 표명한 1549년의 취리히 합의(Consensus Tigurinus)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문서는, 일차적으로 독일어권 스위스 개혁교회(취리히)와 불어권 스위스 개혁교회(제네바)가 신앙적 사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선언한 것이지만, 당시 옥스퍼드 대학의 왕립 교수직(regius professor)을 맡고 있었던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가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듯이, 모든 개혁교회의 공통된 신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적 일치를 얻기 위하여 칼빈은 무려 다섯 차례나 취리히를 방문하였고, 수 많은 서신 교환을 통하여 상호간의 이견과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갈라진 형편을 보면서,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칼빈과 개혁교회의의 노력과 헌신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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