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루터와 칼빈의 일치와 차이 (1)

기사입력 2016.10.29 17:0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렸다는 비판은 종교개혁의 아름다운 이름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로마교회는 개신교회의 분열상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교회의 분열행위로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뼈아픈 지적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와 같은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공유하면서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본질을 왜 지킬 수 없었을까요!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근본적인 관심에서 두 개혁자 사이의 일치와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개혁자들의 노력에 다시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마르부르크 회담 이후 – 루터와 칼빈
‘일치의 성례를 둘러싼 분열’이라는 글에서 우리는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얼굴을 맞대고 논의하였던 역사적인 순간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신념을 표현한 15 조항들 가운데, 놀랍게도 14와 2/3에서 루터와 츠빙글리는 완전히 일치된 견해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회담에서 두 개신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성찬론을 둘러싼 이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형제적 교제를 확립하지 못한 일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그 뒤의 사건 전개를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비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그들 자신으로서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한 차례 만날 수 있었지만, 루터와 칼빈은 단 한번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이 없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라틴어뿐 아니라 같은 모국어(독일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루터와 칼빈 사이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루터는 프랑스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칼빈도 독일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라틴어로 쓰여진 저서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가 종종 독일어로 쓴 글들에서 개혁파를 심하게 비난한 반면 라틴어 저술들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라틴어로만 의사소통한 것은 꽤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루터는 말년에 이르러 스위스의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을 ‘성례주의자들’로 매도하면서 대단한 반감을 가차없이 표출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 개혁파, 특히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 사이의 대립을 중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 루터가 다시 한 번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아주 과격하게 비난하였을 때, 그리고 거기에 대하여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가 똑 같은 방식으로 루터에게 응대하려고 하였을 때, 칼빈은 취리히의 선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그의 뛰어난 영적 은사에서 얼마나 구별되는 인물인지, 그가 얼마나 용감하고 두려움 없는 인물인지, 얼마나 유능하며, 학식 있으며, 또한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항상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인물인지 … 당신이 회상해 보기를 나는 바랍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아마도 루터는 위대한 덕목으로 풍성한 것만큼이나 커다란 결핍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텐데, 그가 나를 마치 마귀처럼 비난하더라도 나는 그를 하나님의 탁월하게 뛰어난 종으로 여기고 그에게 존경을 바칠 것입니다.”

칼빈의 이런 유화적인 태도에 대하여 불링거는 “자네는 독일어로 쓴 루터의 글을 읽어보지 못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루터는 라틴어 저작들에서는 점잖게 말하지만 독일어 저작들에서는 우리 개혁파에 대하여 온갖 비난과 욕을 퍼붓는다네”라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심지어 칼빈은 루터에게 편지를 보내어 직접 만나 대화하며 의견을 나누고 싶다고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분노가 다시 폭발할 것을 걱정한 멜랑히톤이 칼빈의 그 편지를 루터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한 번도 얼굴을 맞대고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에 대한 루터의 영향력과 두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신앙적 일치는 마르부르크 회담의 일치보다 더 분명합니다.

칼빈에 대한 루터의 영향력은 일찍부터 나타납니다. 1533년 칼빈의 친구 꼽(Cop)이 행한 연설에서도, 그리고 ‘루터의 소교리문답’(Kleine Catechismus)를 모델로 삼아 작성된 1536년의 ‘기독교강요’(Institutio)에서도 루터의 영향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1543년에 쉬파이에르 국회에 즈음하여 신성로마황제 카알 5세에게 보낸 칼빈의 유명한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칼빈은 직접 루터의 의의를 높이 평가합니다:

“(교회가) 아주 가련한 상황에 처했을 때, 루터가 무대에 등장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단합된 노력을 통하여 신앙을 깨끗게 할 수 있는 방법들과 길들을 모색하였다. 경건과 짝을 이룬 참된 교리가 회복되었고 교회는 참담한 처지에서 건져 올려져서 다시 상당한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다른 한 편, 루터 쪽에서도 칼빈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말년에 비텐베르크의 한 서점에서 성만찬에 관한 칼빈의 작품을 살펴보고 난 다음에 루터는 이렇게 평합니다:
“이 작품을 쓴 인물은 학식 있고 경건한 자이다. 오에콜람파디우스와 츠빙글리가 이런 식으로 그들의 견해를 표현하였더라면, 우리는 결코 이런 논쟁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대하여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고, 칼빈을 ‘비범한 인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두 개혁자는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서로를 존중하였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둘 사이의 많은 일치점들과 몇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그런 협력을 통하여 한층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일치
네덜란드의 교회사가 프람스마(L. Praamsma) 박사는 ‘모든 시대의 교회’(De kerk van alle tijden, 4 vols)이라는 대중적인 교회사 저서에서,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에 ‘루터의 최종목표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칼빈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라고 배운 것을 회고합니다. (그 시절에는 기독교 초등학교의 수준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루터의 주요 관심사는 ‘경건한 인간’이었고, 칼빈의 주된 관심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조점에서의 차이 이전에 우리는 두 개혁자들이 모두 공감하는 ‘근본적인 일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그리고 근본적인 사안에서 이 두 위대한 개혁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습니다. 루터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투사였으며, 칼빈 또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온 힘을 다하여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독일의 귀족들에게 일생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강력히 촉구하였고, 칼빈 또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이 매일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강조점의 차이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혹은 그런 차이점들을 절대적인 구분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몇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오해되고 있는 점들을 짚어 봅시다.

흔히 ‘예정론’을 칼빈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사상으로 알고 있지만, 루터 역시 ‘노예의지론’(De onderhorige wil)에서 한층 더 강력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른 예정을 가르쳤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모순적인 현실에 직면하였으나 차라리 성경이 가르치는 역설(paradox)을 받아들였지, 인간의 이성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옥에 간 인물로 매도하는 루터를 반지성주의적인 열정적 복음주의자로 여기고, 그에 비하여 칼빈은 지성적인 신학 체례를 확립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야말로 스콜라철학과 인문주의적 학식을 두루 갖춘 인물로서 당대 최고의 논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교회의 화체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바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과 속성들’의 관계를 스콜라신학자들이 부당하게 떼어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정도로 루터는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였습니다. 반대로 칼빈은 네 권으로 구성된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두 권을 성령 하나님의 사역들을 해명하는데 할애한 ‘성령의 신학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B.B. Warfield). (제3권의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서의 구원론, 그리고 제4권은 성령의 외적 사역으로서의 교회론을 다루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과도 결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루터와 칼빈, 두 사람 모두 ‘성경에 따른 올바른 경건의 지식’을 갖추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성경중심의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교리문답을 이토록 강조하고 또 사람들이 이 교리문답을 항상 배우도록 계속적으로 요망하고 요청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들과 영혼을 돌보는 자들이 이 일에 소홀하며, 때로는 지나친 학식 때문에 때로는 순전히 게으름과 자기 배만 생각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의 직분과 이 가르침을 멸시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대요리문답 서론)

종교개혁의 인물들로서 루터와 칼빈 두 사람 모두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탁월한 성경해설가였으며, 대중이 성경을 알기를 원하였고 또 성경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였던 말씀의 종들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루터의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발견합니다:
“여러 세기 동안 개신교 독일의 모든 가정은 매일 혹은 최소한 매 주일마다 교회로 갔는데, 그곳에서는 설교집에 나타난 그 개혁자의 깊고 풍성한 사상이 강단으로부터 선포되었다. 때로는 설교집에 기록된 그대로 혹은 때로는 상당히 완화되고 변형된 형태로. 거기서 사람들은 루터 찬송가의 굳센 멜로디와 영웅적인 가사를 노래한다. 그 찬송가로부터 독일 민중은 대대로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더구나 집안의 가장이 (루터의) 소교리문답으로 자녀들과 가족들을 가르치는 것이 드물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우리 속의 옛 아담이 매일의 회개와 고해를 통하여 그의 모든 죄와 악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집집마다 루터성경이 있었다. 그의 깊이 있는 시적인 번역으로 된 그 성경의 표현들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유산 가운데 참된 한 부분이 되었으며, 비교할 바 없는 소리로 울려 퍼지는 그 말씀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이 언어에서도 그 반향을 찾는다.” (G. Ritter, Luther, his life and work, 1963).
칼빈의 영향력에 관해서도 우리는 하이체마(Th. L. Haitjema) 박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멋진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의 작은 교제에서도 성경은 집에서의 경건 실천에 있어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매일 세 차례 그 가정의 아버지는 모든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경(trouwbijbel)의 한 장을 낭독하였다. 그 성경은 결혼식날 교회의 혼인 예배 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미 1566년 네덜란드 북부의 한 개혁파 신자가 기록하기를, ‘모든 가정에는 30개 혹은 40개의 술병 대신에, 최소한 한두 권의 성경이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순교자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이 준 인상도 결코 가볍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처형되기 전날 방문한 아내와 자녀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도록’ 성경을 선물로 남겼다.”

러므로 우리는 루터와 칼빈 사이의 근본적인 일치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난 종교개혁이라는 동일한 나무의 두 가지였습니다. 

칼빈루터.jpg
 


 (다음호에는 심각한 결과를 낳은  차이점을 살펴 봅니다.)
<저작권자ⓒCTMNews & ctmnews.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상로 102 3층(초량동) | 인터넷신문등록번호:부산광역시 아00096 등록일자:2011.07.25

발행인/편집인 : 김성철,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종철 TEL : 070-7565-1407 FAX : 051-462-6698  | e-mail : ctmnews@ctm.kr

Copyright ⓒ 2011 http://ctmnews.kr All right reserved.

CTM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