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의 흑테러와 세르베투스 사건

기사입력 2016.10.20 19:1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예수회의 설립과 활동 및 트렌트 공의회의 교리적 결정에 주목하여 반동종교개혁의 본질을 살펴본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에는 폭력적인 억압의 여러 사례들을 개관하여서 종교개혁을 좌절시키려 노력하였던 당대 로마교회의 ‘마귀의 회(會)처럼’ 타락한 모습을 돌아보고, 오늘 우리 개신교회를 위한 거울로 삼고자 합니다.
반동종교개혁의 세 번째 특징적인 활동은 교회와 세속 권력이 합작하여 개혁자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하였던 흑 테러(Black Terror)의 사례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타락한 로마 교회는 ‘종교재판소’를 통하여 경건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무법하게 재판하였고, 로마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세속 당국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과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악한 일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되고 ‘신앙의 행동’이라고 미화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이런 끔찍한 흑 테러의 실상을 종교재판소와 성(聖)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 사건, 그리고 특히 스페인에서 자행된 ‘신앙의 행동’(auto da fé)이라는 기괴한 축제를 통하여 개관해 봅시다. 그런 다음에 소위 ‘칼빈과 세르베투스 사건’에 관하여, 그 당대의 형편들을 고려하여 올바른 평가를 내려봅시다.
 
 I. 반동종교개혁의 흑 테러
 
1. 종교재판소(Inquisition)
종교재판소는 이미 중세 시절 알비파와 왈도파에 대한 로마교회의 박해와 관련하여 그 악명을 떨쳤습니다. 장 베르동(Jean Verdon)은 중세는 살아 있다(Le Moyen Age, Ombres et Lumières)라는 책에서 도미니쿠스회 수사이자 유명한 종교재판관이던 베르나르 기(Bernard Gui, 1261-1331)의 ‘프락티카’(Practica)라는 교범서를 통하여 중세 종교재판의 과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한 마디로 범죄 여부를 떠나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초법적인 조치들로 가득합니다. 아무런 근거 없는 고발로도 체포와 구금을 당할 수 있고, 고문을 통한 거짓 고백이 유효한 증거로 인정되며, 이단으로 판정 받으면 화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세속 당국은 그렇게 이단으로 몰려 죽은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이익에 사로잡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시민들의 권리를 방치하였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종교재판관들은 로마교회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얻어내기 위하여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종교재판을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하였습니다. 종교재판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판결하는 곳이 아니라, 신앙을 억누르고 공포를 조장하여 굴종하는 마음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초법적인 강제 수단이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어떤 세속 권력에도 복속되지 않고 다른 모든 법정들보다 위에 있는 법정이다. 종교재판소는 수도사들의 법정(法廷)으로서, 수도사들은 높은 신분이 아니면서도 각 가정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모든 가문들의 비밀들을 조사할 수 있었으며, 아무런 책임을 지지도 않고 그 무시무시한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였다. 종교재판소의 법 집행은 끔찍할 정도로 단순한 형태로 퇴보하였다. 혐의(suspect)만으로 체포하였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하였으며, 자백한 자들을 화형에 처하였다.
고문은 한밤중에 어두운 감옥에서 어스름한 횃불 빛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남자, 여자, 혹은 어린 소녀일 수도 있었던 희생자들은 발가벗겨져서 나무로 만든 고문대 위에 눕혀졌다. 물, 무거운 것, 불, 권양기(捲揚機, windlass), 바이스(vise) 등 모든 고문도구들이 이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근육들을 잡아 늘이지만 그것을 끊어버리지는 않을 정도로, 사지를 상하게 하지만 그것을 산산히 부수어버리지는 않을 정도로, 가장 뛰어난 방법으로 육체를 고문하였다.” (J.L. Motley. 종교개혁 시대인 1572년에 있었던 한 고문에 관한 비참한 기록 중에서)

clipboard0-horz.jpg
 

종교재판소가 설치된 지역마다 종교개혁의 불꽃이 신속하게 꺼져버린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개신교의 모든 흔적들을 무자비하게 근절하였습니다. 나중에 교황 파울루스 4세가 된 추기경 카라파(Caraffa)는 교황의 대사(nuncio)로 스페인에 머물면서 그 종교재판소의 효과(?)를 눈 여겨 보았고, 나중에 이탈리아에도 그것을 도입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4가지 근본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1. 신앙에 관한 문제라면 어떤 연기(delay)도 허용되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 미미한 혐의에 대해서도 가장 신속하게 처벌 수단이 취해져야 한다.
2. 군주나 고위성직자에 대해서도, 그들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어떤 관용(indulgence)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3. 권력자의 보호를 찾는 자들은 극히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죄책을 완전히 고백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부드러움과 자애로운 동정심으로 다루어야 한다.
4. 누구든지 어떤 종류의 이단자들에 대해서도 어떤 형태의 관용(tolerance)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이런 규정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카라파가 이탈리아에 도입한 종교재판소는 신분의 고하를 따지 않고 오히려 귀족 계급을 겨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칼빈주의를 박해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그 지역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대표하던 카푸친 수도회 총장 베르나르디노 오치노(Bernardino Ochino)와 루까에서 개혁자들의 모임을 지도하였던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는 알프스를 넘어 개신교 지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추기경 세리판도(Seripando)가 보기에도, “이탈리아의 종교재판소는 땅 위의 다른 어떤 법정에서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끔직하고 한층 더 두려운 판결들로 악명을 떨쳤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황제 카알 5세는 1522년에 네덜란드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였는데, 알바 공작의 공포정치 기간(1567-1573)에 그 활동이 정점에 달하였고, 귀족들을 포함한 무수한 사람들이 그 학정 아래 신음하였습니다.

1567년에 그는 스페인의 군주 펠리페 2세로부터 거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위임 받아 네덜란드로 파송되었습니다. 알바가 네덜란드로 파견되기 전에 마드리드의 종교재판소 회의는 모든 네덜란드인들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스페인의 국왕은 그 결정에 동의하였습니다. 1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네덜란드로 진주한 알바는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통치 초기부터 나타난 알바의 탈선행위들, 폭정, 미증유의 잔인함; 약탈과 강탈, 추방과 파괴, 포획과 긴장조성, 추방, 재산의 몰수; 심지어 방화와 화형, 교수형, 참수형, 능지처참(break on the wheel), 그 밖에 매우 무시무시하며 들어보지도 못한 갖가지 고문들, 귀족들, 빈부, 노소, 과부와 고아, 남녀, 처녀 등 지위와 신분을 막론하고 가해지는 고문과 살해를 지적합니다. 알바는 죽은 이의 시체도 파내게 하여 교수대 아래로 끌어 갔는데, 어떤 이에 대해서는 참된 참회가 없이 죽었다는 구실로, 또 다른 이에 대해서는 성례 없이 죽었다는 구실로, 그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극도의 곤경에 처한 남편 혹은 아버지에게 극히 작은 돈으로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혹은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그 아내와 자녀들을 죽이고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빌럼 오란녀(Willem Oranje) 공작의 지도 아래, 80년에 걸쳐 신앙과 자유를 위한 독립전쟁을 벌입니다.
 
2. 성 바돌로매 축제일 밤
1572년 8월 24일, 빠리의 한 여름 밤, 주일을 기다리는 평화로운 밤중에 젊은 공작 앙리 드 귀즈(Henry de Guise)의 지휘를 받는 300명의 군대를 필두로 하여, 로마 교회의 지지자들이 조국의 구원자로 칭송 받고 있었던 해군제독 드 꼴리니(de Coligny)의 집에 들이닥쳐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꼴리니 제독이 주선하여 성사된, 샤를르 9세의 누이동생 마고와 위그노(Huguenot)의 지도자 나바르의 앙리의 국혼(國婚)을 축하하기 위하여 빠리에 머물던 무수한 위그노 인물들이 몰살을 당하였습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로 역사에 기록된 이 사건은 사전에 아주 세세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루브르에 묵고 있던 위그노파 관리들은 하나 둘씩 궁정 안으로 소환되었는데, 그곳이 곧 그들의 처형장이 되었습니다. 거리에는 흑 테러(black terror)가 만연하였고, 하수구에는 피가 흘러 넘쳤으며, 세느 강은 위그노의 시체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이 날들의 학살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셨습니다. 코코나(Coconas) 백작은 30명의 위그노를 직접 처형하였는데,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신교 신앙을 철회하면 자비를 베풀어주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신앙을 철회하는 사람들까지도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도록) 단검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페주(Pezou)라는 인물은 국왕 샤를르 9세 앞에서 첫 날 밤에 121명의 위그노를 죽였노라고 자랑하였는데, 그 다음 날에는 그 기록을 경신하였습니다.

학살의 불꽃은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로 옮겨 붙었습니다: 리용, 디용, 오를레앙, 뚜르 등지로 계속 번져나갔습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에 대한 통계는 여러 갈래입니다. 프랑스의 순교자들의 역사를 서술한 끄레스팡(Crespin)에 따르면, 빠리에서만 10,486명이 살해당하였고, 프랑스 전역에서는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린더봄(Lindeboom)에 따르면 빠리에서 1만 명의 귀족과 지식인과 남녀 민중들이 숨졌고, 프랑스 전역에서는 다양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약 2만 5천 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당하였습니다. 마치 단 일격에 프랑스의 개신교의 목이 부러진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아주 진실되게 이 학살을 기뻐하였습니다. 로타링엔의 추기경은 너무나 기뻐서 자신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전령에게 일천 크로넨(kronen)의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추기경들과 함께 화려한 미사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은총의 표시를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교황청이 이 학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기념주화에는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든 한 천사의 모습과 ‘위그노 학살’(Ugonotorum strages)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로마교회로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수치스런 이 학살에 대하여, 후세의 로마 카톨릭 역사가들은 로마교회의 책임을 축소하고 개신교도들이 음모를 꾸몄다고 그 책임을 침소봉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로마 카톨릭 역사학자인 영국의 액튼 경(Lord Acton)은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연구한 다음,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성 바돌로매 학살 사건은 근세기 최악의 범죄이다. 그 학살은 로마가 고백하는 원리들에 근거하여 자행되었다. 그 학살은 교황청에 의하여 승인되었고, 재가 받았으며 찬양되었다. 단지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자신의 신복(臣僕)들을 기만적으로 살해한 한 국왕을 얼마나 높이 찬양하는지, 교황청은 오랫동안 계속된 엄숙한 행위들을 통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세상에 알리려고 하였다.”

6756756.jpg▲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 교황청의 기념주화
 

3. 신앙의 행동(auto da fé)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주, 스페인-포르투갈의 국왕, 네덜란드의 통치자, 이탈리아 남부의 지배자, 신대륙의 광대한 식민지의 주인으로서 당대의 거대한 세계제국을 다스렸던 카알 5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영지를 동생과 아들에게 분할상속하였습니다. 동생 페르디난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물려받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직위를 이었고, 아들 펠리페 2세는 스페인-포르투갈과 더불어 영지 중 가장 부유한 지역인 네덜란드를 상속하였습니다.

로마교회의 강력한 수호자의 위치를 이어받은 펠리페 2세(Philps II)는 때때로 기독교 세계의 리더쉽을 둘러싸고 교황과 충돌하기도 하였지만, 개신교에 대해서는 영락없는 ‘이단박해자’의 면모를 뚜렷하게 드러내었습니다. 1559년에 그가 스페인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하여 ‘신앙의 행동’(auto da fe), 곧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이단자들을 산 채로 화형 시키는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세비야와 로드리고에서 24명의 루터파 신자들이 화형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1562년에는 그 숫자가 32명에 이르렀고, 1569년에는 19명의 칼빈주의자들이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끔찍한 신앙적 박해에 붙여진 명칭, 곧 ‘신앙의 행위’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주의자들은 신앙의 연고로 이런 잔학한 탄압을 정당화하였고, 그 배후에 숨겨져 있는 탐욕적인 동기를 가리워 버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올바른 기준과 지침을 얻지 못하면, 엄청난 광기로 흘러버릴 수 있는 커다란 위험성을 반동종교개혁의 여러 사례들이 생생하게 증거해줍니다. 신앙을 내세우면서 십계명을 어기며, 믿음의 행동으로 치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반대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올바른 길로 인도받지 못하면, 소위 열심 있는 신앙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clipboard4-horz.jpg▲ 스페인의 무자비한 반동종교개혁: ‘신앙의 행위’(Auto-da-fé)
 

현금 한국교회의 형편도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폭력적이고 탈법적인 탄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소위 교회의 지도자라고 간주되는 많은 목사들이 신앙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고 신앙의 순전함을 더럽히는 사고방식과 언행을 예사로 일삼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면 차라리 배척하는 것이 더 낫다’는 부끄러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소위 지도자들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배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하나님의 덕과 공의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자기 식구들만 이기적으로 챙겨주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하나님 상을 마음에 굳게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십계명을 어기는 잘못된 짓을 자행하여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고, 불신자는 아무리 뛰어난 선행과 덕을 보여주어도 지옥 갈 인간들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대하더라도 상관 없다는 오만한 생각이 많은 성도들에게 퍼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가르쳐지지 않는 교회에는 반동종교개혁의 광기로 빠져들 수 있는 그릇된 신앙이 자리잡게 마련입니다. 무수한 이단과 분파들뿐 아니라, 소위 개신교회의 주류 교단들에서도 이런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밝은 면과 아울러 반동종교개혁의 어두운 역사를 똑바로 직시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II.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

칼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갈멜수도회 수사였던 볼섹(Bolsec)은 제네바에서 칼빈의 예정 교리를 공공연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볼섹은 예정 교리가 하나님을 마치 고대 그리스-로마 시인들이 말하는 제우스(주피터)와 같은 폭군으로 만들며, 그 예정 교리의 논리를 따르면 하나님이 자신의 분노 때문에 온당치 못하게 소돔에 대하여 분노한 셈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소돔 사람들은 단지 그들에 관하여 이미 예정된 대로 행하였을 뿐인데 벌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제네바 시당국에 의하여 추방당한 볼섹은 칼빈을 비난하는 저서를 출판하였고, 그로부터 칼빈의 깊은 종교적 개념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이미지, 곧 칼빈주의를 검은 그림자로 묘사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진 이미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공립학교의 서양사 교과서에도 칼빈이 ‘종교적으로 제네바를 지배한’ 신정주의적 정치체제를 제네바에 확립한 인물로 왕왕 묘사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수십 년에 걸친 여러 차례의 치열한 종교 전쟁들의 쓰라린 경험을 거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계몽사상과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 성숙된 이래로, 칼빈은 종종 불관용의 대명사처럼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인상을 깊이 각인시켜준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제네바 시당국에 의한 세르베투스(Servetus, 1509?-1553)의 화형 사건입니다. 재판 석상에서 세르베투스의 거짓된 주장들을 근거로 카스텔리오(Castellio)와 레나토(Renato)가 칼빈을 비난한 저서들을 출판하여, 마치 칼빈이 ‘어떤 세대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잔인하고 비열한 종교재판과 화형의 주된 책임자인 것처럼 색칠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세르베투스의 사망 350주년에 즈음하여, 스위스와 프랑스의 개혁교회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 화형장 부지에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칼빈의 ‘범죄적 행위’를 그의 후예들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신앙상의 차이를 관용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신앙이 다른 자들을 박해한 점에서는 칼빈이나 반동종교개혁의 인물들이나 오십 보 백 보일까요? 종교개혁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재세례파의 관점에 따라 볼 때, 개혁교회 역시 종교적인 불관용이라는 점에서는 로마교회와 별 차이 없는 집단이었을까요?

반동종교개혁의 흑 테러에 관하여 우리가 살펴본 내용과 비교하여, 세르베투스 이단과 관련된 칼빈의 태도를 역사적 사실들에 입각하여 살펴보면, 그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으며 침소봉대되어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차 세르베투스 재판: 비엔느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

‘삼위일체교리의 오류들에 관하여’(1530)라는 저서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방식은 ‘머리가 셋 달린 신화 속의 동물 케르베루스와 같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망상이며, 마귀의 착상’이라고 맹비난 하였던 세르베투스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반박하여 ‘기독교 회복’(Restitutio Christianismi, 1553)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을 때, 그의 이단사상에 대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종교재판은 그가 가명을 쓰며 숨어 지내던 프랑스 비엔느(Vienne)에서 로마교회의 종교재판소에서 열렸는데, 세르베투스는 관련된 자료를 모두 폐기하고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습니다. 이 재판과 관련하여, 칼빈이 세르베투스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을 그를 고발하기 위한 증거로 제공한 부도덕한 자라는 비난이 일어났습니다. 실상은, 제네바에 망명하였던 기욤 드 트리(Guillaume de Trie)가 개혁교회를 비난하며 로마교회로 돌아오라고 강청하던 리용의 친척 아르네(Arneys)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드 트리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개혁파 성도들을 화형 시키면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은 그대로 용납하는 로마교회 당국의 부조리를 비난하면서 숨어 지내던 세르베투스의 존재를 폭로하였는데, 그 사실이 아르네를 통하여 로마교회 당국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사건이 커지고, 아르네를 통하여 확실한 증거를 거듭 요청 받은 드 트리는 칼빈에게 세르베투스와 주고받은 서신을 요청하였으나, 칼빈은 그 서신들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은 이단의 문제는 재판과 형벌을 통해서가 아니라 토론과 설득으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척의 안위와 거짓 증언자로 오해 받을 자신의 사정을 강하게 호소한 드 트리의 간청 때문에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들을 제공하여서, 비엔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빌라누에바(Villanueva)라는 인물이 다름 아니라 ‘기독교 회복’을 저술한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보면, 애초에 칼빈이 드 트리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 비엔느에 숨어 있는 세르베투스를 로마 당국의 손을 빌어 화형에 처하게 하려고 했다는 식의 비난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중상모략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찬 볼섹이나 카스텔리오는 칼빈이 직접 비엔느의 종교재판관에서 편지를 썼다거나 혹은 제네바를 지나가는 추기경에게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주장했다고 하는,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을 유포시켰습니다. 오늘날 이런 악의에 찬 비난들은 사실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1554년 4월에 열린 비엔느의 종교재판은 세르베투스의 위증과 부인으로 점철되었는데, 두 차례의 공판을 마치고 탈옥한 세르베투스가 결석한 가운데 열린 세 번째 공판은 10주간 계속되었고,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선고한 후, 그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이후로 세르베투스는 유럽 전역의 로마 당국 관할권에서는 이단으로 화형 당할 판결을 걸머지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2차 세르베투스 재판: 제네바의 개혁교회 재판소

탈옥하여 도망친 세르베투스는 놀랍게도 제네바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네바의 재판소에서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듯, 공개적으로 칼빈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자신의 주장을 떳떳이 드러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그 당시 제네바의 정권을 잡고 있던 귀족들이 칼빈에게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the Libertines)였던 사실에 기인한다고 평가됩니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세르베투스의 글을 인용하여 칼빈을 반대하기도 하였던 무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단 혐의를 받은 자들에게 가차없었던 로마당국의 종교재판소와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고 있던 제네바의 재판소의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는 사실도 그의 달라진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를 공공연하게 부정하였기 때문에, 세르베투스는 여기서도 역시 이단으로 판결 받아 화형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비엔느의 재판보다 제네바의 재판과 관련하여 칼빈의 책임을 묻기가 더 쉬워 보입니다. 실제로 제네바 시당국에 대한 칼빈의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세르베투스 화형 집행의 배후로 칼빈을 비난하는 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에 대한 옹호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 가보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 견해’가 얼마나 부정확한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지 깨닫고 놀라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세르베투스 화형과 관련한 칼빈에 대한 비판 역시 상당부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재판과 관련된 분명한 사실들을 먼저 확인하고 난 다음에, 세르베투스의 화형과 관련한 칼빈의 역할에 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당시 제네바 시에 대한 칼빈의 영향력에 대한 부분입니다. 1553년의 제네바에서 칼빈은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칼빈은 여전히 스트라스부르크의 시민이었습니다. 칼빈은 1559년에야 제네바의 시민으로 등록됩니다.) 따라서 제네바에서는 법적으로 거류민(居留民)이었던 그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즉 세르베투스 재판을 공적으로 승인하거나 확정하는 등의 사안에 칼빈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던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증인으로 출석하여 재판석상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적 견해를 성경적 교리에 따라 차분하게 반박하였을 뿐입니다.

둘째, 칼빈은 시의회에서 내린 화형 판결에 반대하여, 그의 처벌 방법을 한결 덜 고통스러운 참수형으로 바꾸어 주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의회는 당대 이단들에 대하여 일관되게 집행되었던 화형의 방식을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영향력으로 본다면, 칼빈의 입김이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해 10월에 기욤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처형 방식을 바꾸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단의 사형 방식으로서 당대에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었던 화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던 사람은 칼빈 밖에 없었습니다.

셋째, 제네바의 시의회는 그들이 내린 재판의 결과에 대하여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의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었던 취리히, 베른, 바젤, 그리고 샤프하우젠의 시의회에서도 세르베투스에 관한 제네바의 판결은 모두 지지와 승인을 받았습니다. 특히 베른은 공공연히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주장하였습니다. 즉, 세르베투스 사건은 칼빈의 독재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제네바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르베투스의 이단설은 당대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즉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넷째, 칼빈은 형 집행을 기다리던 세르베투스를 감옥으로 방문하여 그의 견해를 바꾸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사망을 굳게 확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칼빈은, 비록 세르베투스가 육체적인 죽음을 면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은 과연 반동종교개혁의 흑테러와 비교할만한 일인가?

우리는 로마교회의 종교재판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재판관(elohim, 시 82:1)이 아니라, 공포를 조장하여 양심과 신앙을 억압하는 로마교회의 종교재판관이, 납득할 만한 근거 없이 고발당한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으로 증거를 날조해 내어, 회개의 여부에 아랑곳 없이 화형에 처하고, 그 모든 사법과정을 통하여 피해자의 재산을 갈취하는 위정자의 탐욕과 결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국혼을 축하하러 모인 시민들을 아무런 정당한 재판의 절차도 없이 학살한 성 바돌로매 축일의 흑테러와 그 사건을 접하고 기뻐 날뛰었던 당대 교황청의 추악한 몰골도 보았습니다. 수십 아니 수백, 수천 명의 경건하고 (법적으로) 무죄한 그리스도인들을, 단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믿고 고백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면서, 그것을 ‘신앙적인 행동’이라 자화자찬하면서 파티를 벌였던 로마 카톨릭 권력자들의 광기 어린 모습들도 보았습니다. 그런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곳이 바로 종교개혁 당대의 유럽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제네바에서 열린 세르베투스 재판과 처형은 로마교회에서 일어난 흑 테러들의 사례들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세르베투스는 무고하게 고발당한 것도 아니고,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고, 거짓 증거들이 제기되거나 조작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의견을 떳떳하게 밝힐 기회를 박탈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제네바의 법정은 당대 로마교회의 종교재판소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칼빈의 생전에 신성모독의 이유로 사형 판결은 받은 사람은 오직 세르베투스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부인하는 일은 그 시대에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었던 중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을 당대 로마교회의 종교재판관들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견강부회한 일인지 모릅니다! 반동종교개혁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행들에는 눈감으면서,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만을 부각하여 칼빈을 비난하는 것 역시 얼마나 맹목적이고 편향된 비판인지 모릅니다! 종교재판소의 추문은 거의 언제나 탐욕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칼빈의 청렴함은 심지어 교황조차도 개탄하면서 인정한 바 있습니다. 칼빈이 사망하였을 때(1546), 교황 피우스 4세는 “이 이단의 힘은, 돈이 그에게 아무런 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고 말하였을 정도였으니까요. 악행을 일삼는 자의 비리에 익숙하여, 선량한 사람이 한 차례 저지른 실수가 오히려 더 크게 보이는 착시 현상일까요?

 사형제도는 비성경적인가?

다른 사항들은 다 이해하더라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사형에 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고, 따라서 칼빈 역시 그 시대의 아들로서 ‘벗어버려야 할 악습’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견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써’(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기본 원리에 따라, ‘성경은 사형제도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리고 신앙적인 이유로 사형판결을 내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제6계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적용 문제입니다. 이 주제를 지금 깊이 있게 다룰 여유가 없지만, ‘살인하지 말라’라는 제6계명을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해석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의도적이고 불법적인 살인’(ratchach)에 대한 엄격한 처벌 방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공적인 권력에 의한 사형제도를 ‘합법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깊이 있는 논의를 위해서는, J. Douma, The Ten Commandaments: Manual for the Christian Life, P&R, 1996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소위 진보주의적 견해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위선을 여기서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하여 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을 미개한 국가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국가는 시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 빼앗을 권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서방의 선진국들’은 자국민이 아닌 사람들의 생명은 전쟁이나 여타 수단들을 통하여 예사로 빼앗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의 목숨에 대한 가치가 국적에 따라 현격하게 달라집니다. 사형제도 폐지를 소신 있게 주장하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한 침략 전쟁에 대해서는 그만큼 소신 있게 일관된 반대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인본주의적 주장은 이처럼 일관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알지 못합니다.

칼빈과 권징의 열매
그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칼빈이 아주 고상한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엄격한 권징을 실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칼빈을 미워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권징을 중요시한 결과가 제네바에서 (그리고 개혁신앙이 보급된 여러 지역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을 시작한 1530년대에, 그 도시 주민들의 윤리적인 삶의 수준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단히 낮았습니다. 특히 제네바의 유력한 시민들은 부도덕한 생활방식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칼빈과 그의 친구 파렐은 성만찬을 베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칼빈의 제1차 제네바 사역이 그렇게 짧게 끝났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는 존 녹스(John Knox)의 증언을 통하여, 복음의 강설과 권징을 통하여 변화된 제네바의 모습을 듣게 됩니다. 녹스는 1550년대의 제네바에서 지상에 구현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학교’를 체험하였다고 고백하는데,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교회적 예배 모두에서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올바르게 개혁된 도시로 제네바를 높이 칭송하였습니다. 심지어 로마교회 측의 증언들도 말씀과 권징으로 변화된 제네바 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서 프랑스의 로마 카톨릭 정치가인 안느 드 몽모랑시(Anne de Montmorency)가 1560년에 쓴 한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해 봅시다:

“이 도시에 다녀와서 단순히 이 도시를 찬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사람이 프랑스 안에서만 최소한 3만 명 이상입니다. 종교 분야뿐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그처럼 잘 조직되고 균형이 잡힌 모습을 직접 보게 되었을 때, 이들은 찬양을 넘어서도 심지어 경탄에 빠져듭니다. 그토록 다양한 나라들과 민족들에서 온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이루고 있는 한 도시가 그처럼 하나가 된 모습을, 숙련공들이 망치와 다른 연장들을 움직이는 소리 외에는 다른 어떤 소리들도 들리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도시에 관해서는 아마 그 당시에… 나폴리에서 제네바를 거쳐 집으로 행진하고 있던 군인들 말고는 달리 아무도 증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바는, 그들이 로마와 교황제의 무자비함으로부터 떠나서 호숫가에 있는 그 도시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마치 지옥에 등을 돌리고 작은 낙원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고 합니다.”

칼빈을 ‘신정주의정치체제를 이룩한 독재자’라는 비난은 이러한 유력한 증언들 앞에서 그 비판의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로마교회의 타락과 심지어 종교개혁의 교회들에서도 여전한 ‘변화되지 않은 삶의 현실’을 비판하였던 온건한 재세례파들의 상당수가 칼빈의 개혁교회로 들어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참된 교회를 그 사회에 세웠던 것입니다. 오늘도 개혁교회는 그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작권자ⓒCTMNews & ctmnews.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상로 102 3층(초량동) | 인터넷신문등록번호:부산광역시 아00096 등록일자:2011.07.25

발행인/편집인 : 김성철,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종철 TEL : 070-7565-1407 FAX : 051-462-6698  | e-mail : ctmnews@ctm.kr

Copyright ⓒ 2011 http://ctmnews.kr All right reserved.

CTM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